이십 년 만에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1975)를 다시 읽었다. 물론 예전 같지 않았다. 감수성이 다 사라졌다.
이 단편집은 환멸에 대한 기록이나 다름없다. 그중 ‘가짜’라는 작품이 재미있었다. S는 ‘상점에서 물건을 훔치고 항구에서 에로 엽서를 팔던 부랑자 출신’이다. 그런 남자가 대부호가 되었다. 여러 가지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남자는 예술품 수집에 정성을 다한다. ‘정체성이 분명한 예술작품은 불안정한 영혼 속에서 절대적인 확실성을 일깨운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S는 최근 바레타라는 남자가 거액을 주고 산 반 고흐의 작품이 위조라는 걸 증명하려고 한다. 바레타가 사정해보았지만 S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진짜만이 종교다.
S는 최근 나이 어린 미인 알피에라와 결혼했다. 외모에 비해 겸손하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여자다. S는 그녀를 자신의 소장품 중 제일가는 걸작이라고 생각하고 칭송해 마지않는다. 이 결혼으로 그녀의 부모, 시골 친척들까지도 큰 혜택을 누리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상한 사진이 배달되기 시작한다. 기괴하도록 못생긴 코를 가진 어떤 여자의 사진이다. 알고 보니 성형을 하기 전 알피에라가 아닌가. 분노에 찬 바레타가 어렵게 구한 사진을 S에게 보복으로 보낸 것이다. 아내는 울며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우는 저 여자는 진짜가 아니다. S는 이혼한다. 그다음에는 영원불멸의 미녀를 그린 진품 라파엘로를 구매한다.
인간에게서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기준은 어디일까. 참 어려운 일이다. 특히 외모에 관한 한 더 그렇다. 로맹 가리도 요즘 사람이라면 이 문제에 대해 그렇게 단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단편집에서 비슷한 주제를 표제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서 발견한다. 카페 주인 레니에는 산전수전 다 겪은 남자다. 지친 남자는 세상에 더 이상 기대할 건 없다고 여긴다. 오죽하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페루에 정착했을까. 멀리서 날아온 새들이 떨어져 죽는 해안가이다. 그곳은 세상의 끝이다.
거기에 어떤 여자가 나타났다. 그는 여자가 바다에서 자살하려는 순간 구해냈다. 레니에는 그녀를 치유해주고 싶다.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싶다. 이렇게 삶을 긍정해도 되는 건가 자신에게 묻는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남편이 나타났다. 나이 지긋한 남편은 불감증 아내를 위해 뭔가 수작을 부렸다. 강간범들을 고용해 일을 벌인 건 아닌가. 레니에 역시 그녀를 위한 성기능 치유책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레니에와 여자의 남편은 같은 이유로 그 여자에게 반했다. 그들은 자신들에 비해 20~30살이나 어린 여자에게 빠졌다. 그녀의 남편과 마찬가지로 레니에도 절망을 되풀이 할 테지. 그는 젊어서 이상주의자였다. 그러나 지금도 현실과 동떨어진 철부지 소년이다.
그는 여자를 구해낸 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기 전에 잠시 망설였다. 때때로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기습적인 불쾌감이 느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배반당하지 않았다.’ 레니에는 자신이 구한 여자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을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름다웠고 가냘프고 청순했다. 안도의 숨을 쉬었다.
젊은 여자는 왜 이렇게 나이 든 남자들 틈에서 헤매고 있는 걸까. 그녀의 내면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까. 우리는 타인을 모른다. ‘가짜’의 알피에라는 외모만 가짜라고 판결이 났지만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그녀는 내면이 가짜일 확률이 높다. 가짜가 아니라면 이 남자, 저 남자와수상한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다.
외모에만 집중하다가는 속물을 만날 수 있다.로맹 가리는이산과 전쟁을 수 없이 겪었다. 인간에게서 희망보다는 좌절을 보았다.
더 완벽한 가짜 여자이야기,‘언더 더 스킨’(2013)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이 영화는 괴이하도록 매혹적이다. 외계인들이 지구에 왔다. 부족한 식량을 얻기 위해서다. 식량이란 인간을 의미한다. 한 녀석이 로라라는 여자를 납치해 죽이고 그녀로 위장한다. 그러니까 스칼렛 요한슨은 겉만 여자지 사실은 외계 생물이다. 가짜 로라는 이제부터 남자들을 사냥한다. 워낙 아름다워서인지 남자들은 단번에 넘어간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매우 감각적인 영상을 만들었다. 모노크롬 회화를 보는 듯 스코틀랜드의 황량한 장소들이 영화 내용과 잘 어울렸다.
외계인 로라는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순수 원시인이나 다름없던 그녀가 서서히 눈을 뜬다. 로라에게 사냥당하는 이들은 단지 남자라서 여자에게 끌리는 게 아니다. 외로움이나 고독에 사무친 이들은 그녀가 누구든 내민 손을 잡는다. 그녀가 흡수하려는 남자 하나는 기형적 얼굴을 가졌다. 로라가 데이트를 신청하자 남자는 흠칫 놀란다.자기에게 말을 거는 여자라니 상상도 모한 일이다. 죽어도 좋았을 것이다. 물론 로라는 그 이유를 모른다. 지구인이라면 그런 얼굴을 한 사람에게는 애인은커녕 친구도 드물 거라는 걸 안다. 남자들을 자꾸 흡수한 외계 괴물은 차츰 인간을 닮아간다. 그녀는 혼자다. 이상하게도 점점 외로워진다.
그동안 그녀는 남자들을 먹이 대상으로 사냥해왔으나 드디어 호적수를 만났다. 외딴곳에 사는 남자가 로라를 겁탈하려 한다. 그러나 로라가 누군가. 피부가 찢긴 그녀는 무정형의 검은 덩어리임을 드러낸다. 공포에 질린 남자는 괴물을 산채로 불태운다.
제목도 중의적하다. ‘언더 더 스킨’이라니. 피부 한 꺼플만 벗겨도 진실이 드러난다. 아니, 그건 필요 이상의 정보이다. 실상을 너무 정확하게 알 필요는 없다. 확대경도 부족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상상과는 다른 존재를 만나기 쉽다.
만일 레니에가 여자의 실상을 몰랐더라면 더 이상 인간에 분노하지는 않았으리라. S 역시 바레타의 값비싼 위조품을 밝히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것 같다. 바레타도 알피에라의 비밀을 캐지 않았을 테니.
로라는 자꾸 인간이 되어간다. 인간은 혼자서는 고독하다. 상처받기 쉽다. 피부 아래를 들여다보지 말자. 그들이 보여주는 만큼만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