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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Aug 01. 2022

 어떤 작가

무진기행, 헤어질 결심, 호프만이야기




유명 인사가 추천하는 영화를 보여주는 영화제가 있었다. 누가 추천했는가에는 관심 없이 영화를 골랐다. 에릭 프레스버거와 마이클 포웰, 두 감독이 연출한 ‘호프만의 이야기’(1951)이다. 오펜바흐의 오페레타 ‘호프만의 이야기’를 영화화했다. 이 영화가 ‘지루하고 난해하고 또 기막히게 아름답다’는 소문은 알고 있었다. E.T.A. 호프만은 독일 낭만주의 시대 작가다. ‘모래 사나이’나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을 읽어보았는데 괴이하기 짝이 없는 작품들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오페레타 ‘호프만의 이야기’는 원래 연극을 위한 대본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1881년, 대본가는 호프만의 단편 세 편을 각색하고 앞뒤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덧붙여 5막의 희곡을 완성했다. 당시 사람들은 오페레타에 앞서 이미 이 연극을 즐겼다. 이렇게 괴상한 극을.

몰려오는 잠에 굴복할 수만은 없었다. 놓치고 말기에는 영화가 아까웠다. 거기에는 집요하게 흐르는 탐미적 세계관이 녹아 있었다. 1951년 작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색감, 눈부신 세트, 의상 등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미리 연주 녹음된 오페라의 리얼타임에 맞추어 진행되는 작품이므로 카메라 워크에 오차가 있을 수 없다. 호프만, 세 명의 여자들, 악마, 뮤즈 등이 빈틈없이 제 역할을 해냈다. 캐릭터들은 과장된 얼굴이나 몸짓으로 고딕적 성격을 드러낸다. 표현주의 회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두 명의 감독은 온갖 실험기법을 동원해 화면을 마술로 바꾼다. 예술지상주의자 호프만은 환영이나 환각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자각한다. 오히려 자신을 막아서는 유혹을 뿌리치며 시인으로서의 본분을 깨닫는다. 그는 고난의 길을 향해 묵묵히 떠날 것이다. 영화는 그 자체로도 좋았지만 예술가 상에 대한 탐구로서도 기억할 만하다. 노발리스의 ‘푸른 꽃’이나 에단 호크가 나온 영화 ‘파리 5구의 여인’처럼 작가의 내면에 대한 우화로 읽힌다. 작가라면 관심이 갈만한 주제다.

누가 이렇게 기괴한 영화를 추천했을까 궁금했다. 박찬욱 감독이었다. 과연 이 분답다고 생각했다. 나는 박찬욱 감독의 작품들을 많이 보지 못했다. 선연하고 선명한 영상을 거부하는 탓이다. 그래서 이번 영화 ‘헤어질 결심’(2021)은 망설임 없이 보았다. 이건 15세 관람가에 끔찍한 장면도 별로 없다고 했다.

음, 명작이었다. 어두운 영화관 구석에서 이 영화에 감동받은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오랜만에 진한 페이소스를 느꼈다. 그리고 OST도 좋았다. 생각해보면 최근 들어 이런 로맨스 영화를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사랑보다는 다른 할 말이 더 많은 시대이다 보니.

제작사 이름부터 마음에 들었다. ‘모호’라고 한다. 나는 인상주의 시대에서 못 벗어났는지 대상과의 경계를 뚜렷이 긋는 태도를 선호하지 않는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처럼 양식/강령/방향성을 부정하려 하고 우연과 불확실성에 끌린다. 영화사에서 주제곡으로 ‘안개’를 쓴 것도 같은 이유 아닐까. 선보다는 색이나 형태.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는다.

나도 정훈희의 ‘안개’를 많이 좋아하고 자주 흥얼거린다. 이 노래를 들으면 부모 세대의 삶이 흑백 필름처럼 아련히 떠오른다. 스카프를 매고 하이힐을 신은 여자, 큼직한 무채색 옷에 귀마개 모자를  남자. 우리 동네에는 새벽마다 안개가 자욱이 끼곤 했는데 안개 사이로 문득 누군가가 나타나 낮은 집들 그리고 한적한 길을 걸어가곤 했다. 어디를 향해 갔을까. 짙은 안개가 그들의 뒷모습을 가려 끝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안 보여서 다행이다. 그들은 안개를 걸어서 그저 자기들의 일터로 갔을 테다. 그 시절 대부분 사람들처럼 힘든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김승옥의 ‘무진기행’(1964)은 김수용의 ‘안개’(1967)로 영화화되었다. 그 영화의 주제곡이 정훈희의 ‘안개’다. 안개는 욕망과 권태, 그리고 추악함을 묻어버린다. 들추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것만 맞다고 믿고 싶다. 그래도 될까? 사실은 잘 모르겠다.








극 중 탕웨이는 팜므파탈에다가 소시오패스다. 누아르 영화에서는 흔히 굉장한 미녀들이 등장해 형사들의 혼을 빼놓는다. 형사들은 심정적으로 이미 그녀들의 편이고 수사는 형식적이다. 심지어 나중에 여자의 범죄 행각을 눈치챈다해도 박해일처럼 봐준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탕웨이는 사람을 여럿 살해했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자신이 사람들을 살해한 이유도 합리화한다. 어떤 이들은 스스로 원했고 또 다른 이들은 자신을 학대한 결과로 보복당한 거라고 자위한다. 그녀는 살인마나 마찬가지다. 동시에 고상한 인간이기도 하다. 참 어불성설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현실에 대한 준엄한 보고서일 수도 있겠다. 그녀는 환경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품위 있는 사람들과 만날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고 스스로 진단한다. 주변 인물들이라 봐야 치매 노인들, 악덕 공무원, 사채업자, 삼류 건달들이다. 제대로 된 사람 한 번 만났다 했더니 자신을 취조해야 하는 형사다. 그녀는 처참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 동시에 품위 있는 남자에게 괜찮은 여자로 기억되고 싶다. 그건 ‘붕괴’되고 있는 한 남자를 구원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는 끝내 자신까지도 살해한다. '

영화의 전반부는 '무진기행'과 닮았다. 소설 속 윤희중은 이미 세상의 달고 쓴 맛을 두루 맛보았다. 겉으로는 근사한 삶을 살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안으로는 무너지는 인물이다. 그는 무진에서 자신을 닮은 하인숙을 만났다. 그녀는 치졸한 이들이 들끓는 무진을 떠나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싶다. 그러나 희중은 인숙을 구원해 줄 용기가 없다.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희중은 인숙을 거부하고 도주한다. 자신의 실체를 덮은 채 살아가는 것만이 그가 나아갈 길이다. 나머지는 안개가 알아서 감춰준다. 여기까지가 "무진여행"이다.


만일 하인숙이 상경해 윤희중에게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까? '무진기행'의 후일담이 궁금하다. 하인숙은 뮨희중 곁에 머물기로 마음 먹는다. 그녀는 남자가 있는 곳으로 스며든다.

‘헤어질 결심’의 두 남녀도 닮은 데가 많다. 탕웨이는 박해일을 구원자로 삼았다. 그러나 그녀는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는 그걸 안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번지듯이 서서히 오는 사람이 있다.’ 그녀가 택한 전략이 바로 안개이자 잉크다. 거세게 한 번 몰려오는 사랑이 아닌 안개처럼 스며드는 사랑을 택했다. 그래서 영화가 익숙한 듯 낯설었던 거다. 은근하게, 은밀하게 스미는 안개 같은 감성을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뜨거운 사랑보다는 변치 않는 마음을 찬양하는 영화다. 반가웠다.


사람들과 좋아하는 소설이나 영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의 체온이 느껴진다. 어느 정도 일체감이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작가들, 감독들은 자신의 정체를 공개적으로 능숙하게 밝히는 이들이다. 그전에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영화 ‘호프만의 이야기’를 본 후, 박찬욱 감독이 모더니즘 시대 예술가의 혼을 이어가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주의라는 건 사라지지 않는다.

'헤어질 결심'에는 인간미가 흐른다. 제대로 잘 살고 싶다는, 품위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그런 믿음에 대한 시이다. 인간미, 그런 건 이제 주위에서 보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으리라. 관객들은 영화 속에서나마 만나서 즐겁고 반갑다. 호프만이 자신의 길을 발견했듯이 좋은 작품을 본 이들도 작은 빛을 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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