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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Aug 10. 2022

되풀이 없음

백년의 고독,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

‘백 년의 고독’(1967)은 콜롬비아  출신 호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이다. 1984년에 이 책을 읽었다. 영어 중역이었곘지만 남미 문학을 그때 접했다.  

    

처음 읽을 때 인물에 집중해 읽었다. 나무 하나 하나를 살피느라  숲이 어떤 형태였는지 몰랐다. 다시 읽어보니  이 소설은 영미중심의 자본주의, 식민주의, 제국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저항으여겨졌다. 60년대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아옌데, 카스트로, 체 게바라에 동조했다. 시간이 흘러 다시 읽는다면 달리 해석할 수도 있겠지. 그 정도로 이 책은 다층 다차원적 겹을 지닌다.


우리의 80년대는 리얼리즘의 시대라고 하지만 물밑에서는 환타지가 세력을 키워 가고 있었다. 세상은 불안정했고 갈등의 수위가 표면 밖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거리로 달려 나가기에는 심장약했고 상황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렇다고 현실을 인정하느냐 하면 그런 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현실/비현실/초현실의 경계를 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고 보는 편이 옳겠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건 괴로운 세상을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의 외침이다.    

  

그때는 세르비아계 영화감독인 에밀 쿠스투리차가 한참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이 감독의 영화를 통해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다. 자기가 딛고 있는 땅의 현재를 인정할 수도 탈출할 수도 없는 자의 고독, 슬픔을 빗댄 용어다.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를 부여안은 사람들의 피난처이기도 하다. 그 후로 한국에도 68 혁명의 실패담이나 개인의 내면세계에 대한 몰입을 다루는 작품들이 많이 등장했다. 세상에는 좌절이나 패배의식을 내면화해서 오래도록 간직하는 이들이 다. 그 시절 라틴의 붐 소설이나 하루키 열풍도 그런 시대 배경을 품고 있다.         


‘백 년의 고독’에는 길고 험난한 한 집안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다. 문명에의 시원과 종말에 대한 압축된 우화라고도 해도 좋을 것 같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82년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단지 문학적 표현양식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공할 만한 현실 때문에수상했라고 말했다. 는 카리브해 인근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적, 역사적 정황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공간을 마콘도라는 한 장소로 한정지었다. 윌리엄 포크너가 남북전쟁 이후의 남부를 대표할 모델로 요크나파토파라는 장소를 제시한 것과 마찬가지다. 기간은 100년. 소설에 콜롬비아의 1000일 전쟁(1899~1902), 바나나 농장 학살(1928)이 기술되어 있으므로 대략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중반을 다룬다. 물론 구체적인 시간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마콘도는 가상공간이고 이곳의 시간은 지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니까.     


초기 개척자들은 우연히 이곳에 정착한다. 동서남북이 늪과 산으로 막혀 외부로의 통행이 자유롭지 못한 곳이다. 그러나 문명의 시작은 화창하다. 사람들은 근면하고 소박하다. 병이나 죽음도 없으니 유토피아나 다름없다. 그곳은 ‘무한’하고 ‘영원’하다.      


그러나 이곳에도 틈이 있어 집시들이 드나들면서 새 문명을 소개한다. 마콘도의 정신적 지주이자 부엔디에 가문의 아버지인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에는 신문물에 정신없이 빠져든다. 서구인이 만든 현대문명은 마콘도를 유한성, 죽음의 땅, 고독으로 데려간다. 부엔디아는 이곳이 천국인지도 모르는 채 새것의 마법에 홀려 무한의 법칙만 발견하려 한다.     

  

(그는) 모든 동작을 영구히 계속 시킬 비결을 찾아내기 위해 장난감의 기계장치를 다 뜯어보았고 그리하여 창자가 부서진 온갖 동물들이 뒤범벅을 이룬 천국에서 나날을 보냈다.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에는 열정을 다해 마콘도를 개척한 인물이다. 그는 현실이라는 땅에 굳건하게 발을 내린다. 땅과 작업을 사랑했고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헌신했다. 그러던 이 사람이 집시 멜키아데스가 소개한 문물매료된다. 멜키아데스는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나 다름없다. 프로메테우스가 천진무구 상태의 인간에게 정을 느껴 불을 가져다주었듯이 멜키아데스도 원시 공동체에 문명을 가져왔다. 그 후로 부엔디아는 자신의 일과 가정을 버려두고 미친 듯이 연구에 몸을 바친다. 그 결과 마술과 행복의 결정체였던 마콘도는 기계와 정치 그리고 따분함에 젖은 뻔한 곳이 된다.         


태초의 그 사람, 부엔디아는 극렬한 이중성을 한 몸에 키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자란 고향을 등지고 새 땅를 개척한 무모하면서도 용감한 이이다. 그런 사람이 이제는 집과 일을 버려두고 천문학, 고고학, 연금술에 빠져든다. 안으로만 파고드는 내면의 탐구자가 된 것이다. 부엔디아의 후계들도 그를 닮았다. 있는 힘을 다해 떠나든가, 아니면 골방에서 나가지 않든가 둘 중 하나가 된다. 떠나는 이는 아르카디오라는 이름으로, 안으로 파고드는 이는 아우렐리아노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백 년의 고독’은 이렇게 아르카디오들 그리고 아우렐리아노들의 7대에 걸친 이야기다. 부엔디아 가문은 돼지 꼬리가 달린 채로 태어난 7대 아우렐리아노가 개미들에게 잡아먹히면서 끝이 난다.      


스토리는 묵시록적이다. 이 집안의 시작과 끝은 멜키아데스의 암호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6대 아우렐리아노가 이 암호문을 해독하는 순간 마콘도는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 이제 아르카디오와 아우렐리아노는 무의미한 삶을 반복할 필요가 없다. 100년 동안이나 고독에 시달렸기에 이 종족은 이제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된다. 멜키아데스는 자신의 과오로 괴로움에 처하게 된 이 집안사람들에게 죄스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사상태로 마콘도로 돌아와 암호문을 작성하게 된다. 그 문장이 해독되는 순간 환영은 사라지고 반복되는 운명 내릴 것이다.      


작가가 시간과 공간을 일정하게 제한시킨 이유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거짓된 삶이 가져오는 절대 고독을 실험하기 위함이다. 1대 부엔디아는 마콘도에 신문물을 받아들여 삶에서 영원을 추방시킨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그는 죽기 직전 자기의 삶이 무한히 반복될 것임을 예견한다. 마치 천벌을 받는 거나 다름없다.     

 

혼자 있는 동안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끝없이 연결된 넓은 방들을 꿈꾸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똑같은 쇠장식이 붙은 침대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고 그 안에서 똑같은 등나무 의자와 뒷벽에 붙어 있는 성모 마리아의 그림을 구경하는 환상을 보았다. 그 방에서 나온 그는 먼젓번 방과 똑같은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다시 문을 열면 또 다른 똑같은 방이 나타났으며 그리고 또다시 문을 열면 똑같은 방이 나타나고 계속해서 똑같은 방들이 나타났다.     


부엔디아들은 계속 되풀이되는 운명 속에 허덕여왔다. 그것은 ‘고독’, 가짜 삶의 의 진짜 이름이다. 이 문명이 거울이자 신기루라면 차라리 사라지는 것이 낫다. 작가는 유토피아를 해친 신문명을 거짓이라고 간주한다. 원래 그곳에서 살던 원주민들은 서구의 도움 없이도 삶을 사랑했고 선명하게 그것을 느꼈다.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낸 서구인들이 카리브해의 행복을 깨뜨린 건 아닌가. 그들이 진정한 삶을 방해했기에 마콘도는 전쟁에 휘말려 들었다. 미국인들은 바나나 농장을 세워 원주민을 착취한 것도 모자라 삼천 명이나 되는 노동자들을 학살하는데 앞장섰고 삶은 피폐해졌다.   

       

무엇보다 부엔디아 가문의 숱한 인물들은 1대 부엔디아의 업보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서 도망쳐도 다시 이곳으로 질질 끌려온다. 방황하지 않기 위해 내적 항해를 계속한다고 뭔가를 얻는 것도 아니다. 금을 금붕어로, 금붕어를 녹여 다시 금으로 되풀이할 뿐이다.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누구 하나 사랑을 짓고 완성하지 못한다.   


작가가 사랑했던 카리브해 인근, 원주민들의 신화와 문화가 보존되어 있다는 그곳은 낯설다. 위험해 보이기도 한다. 드니 빌뇌브의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2015)’에는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출신의 암살자가 등장한다. 암살자, 알레한드로는 복수만이 전부. 피도 눈물도 없다. 한 집안의 가장이자 지방 검사였던 인물이 마약 관련 수사로 집안이 쑥대밭이 된 후 사적 복수를 위해 작전에 뛰어든다. 비극에 뒤를 이어 또 다른 원한 쌓는다. 이것이 최근에 본 된 콜롬비아의 모습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 비극이 어디서부터 출발했을 찾으려 한다. 작가는 영국여왕 엘리자베스1세 시절, 해적왕 프랜시스 드레이크(1540~1596)쳐들어온 그날부터라고 진단한다. 영국인들이 들이닥친 그날부터 이곳은 돼지꼬리 인간을 배태할 운명에 처한다. 작가는 영미 중심 앵글로 색슨의 라틴 아메리카에의 출현 지극히 회의적이다.

     

‘백 년의 고독’은 독자로 하여금 우리의 위치, 삶, 운명 등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폭이 넓은 독서 체험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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