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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Aug 25. 2022

철수를 생각하며

배수아, '철수'


배수아의 소설을 읽어왔다. 초현실, 비현실, 꿈의 세계, 환상 이런 낱말이 떠오르는 작품들이 많다. 작가는 이 땅과 이탈되어 저기 다른 차원에서 사는 이들을 그린다. 등장인물들은 밥을 먹고 배설을 하며 직장에도 다닌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공간에 거주하기는 하되 다른 식으로 보고 듣고 행위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중적 풍경에 대한 감각적 묘사’에 능하다.

어떤 곳이 있다. 키리코나 폴 델보가 그리는 이상한 공간, 차갑고 건조한 곳이다. 한 여자가 지나간다. 공간은 주인공의 심리를 투영한다. 배수아의 작품은 그렇다.

드물게도 ‘철수’(1998)는 다르다. 삶이 만져진다.  낡디 낡은 옷, 마른버짐 핀 피부가 되살아났다. 작가는 8~90년대에 20대를 보냈다. 초월녀로부터 ‘삶의 현장’으로 복귀한 느낌이다.

주인공 ‘나’는 가난한 여자이다. 처음에는 ‘나’도 땅을 딛고 있었다.그녀는 자기 자리에서 떠나지 않으려 애쓴다. 그러나 종국에 가서는 줄을 놓아버린다. 이면을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배수아의 주인공은 이렇게 해서 이공의 세계로 떠나버렸다. 스스로 떠난 건 아니다. 생이 추방한 것이다. 망명객이 된다. ‘철수’를 읽으면 주인공이  떠난 이유를 조금은 알게 된다. 여기 이 공간은 견디기 어렵다.

‘나’는 하루하루가 쉽지 않다. 아버지는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 그는 양심범도 아닌 횡령 사범이다. 모친은 알코올 중독자로 자발적 추방자나 다름없다. 낮부터 마셔대는 술 때문에 제정신으로 있는 시간이 드물다. 오빠는 학창 시절에는 왕따에 은둔형 외톨이였고 지금은 일용직을 전전한다. 그는 대학 진학도 포기한 채 일본으로의 밀항을 꿈꾼다. 어린 여동생도 서서히 인생을 알아가는 중이다. 소녀에게는 꿈이 다. ‘나’는 절망으로 둘러 싸인 집안에 숨이 막힌다.

주인공은 집안의 주요 수입원이다. 그것도 식당 알바+대학 조교와 같이 투잡을 겸해야 가능하다. 세탁기도 없어 가족의 세탁물을 손으로 빨아야 한다. 식사 당번도 그녀의 몫이다. 가족은 빈민가의 골목 안쪽 허름한 집에서 산다. 누구 하나 손보는 이가 없으므로 점점 더 찌그러져 간다.

‘철수’의 이런 배경을 오랜만에 만나보았다. 예전에는 이런 달동네들이 곳곳에 있었다. 현재도 미래도 어두운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그 정서, 그 기억들. 기억을 선명하게 만드는 장소들이 있다. 지금은 거의 사라져 이미 보편 공간으로서의 지위도 사라진 . 그녀의 찢어질 듯한 가난. 도무지 손도 댈 수 없는 삶. 누더기가 되어 죽죽 찢어지는 남루한 매일매일도 공간 해체와 더불어 사라졌으려나. 알 수 없다. 떨치고 싶은 어떤 기억은 잔인하게도 줄곧 매달려 있으니.

‘나’는 대학생이다. 그러다 보니 주변 사람들과의 차이가 더 뚜렷해진다. 한쪽에는 자신이 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부유한 이들, 공부한  이들, 중산층, 상류층. 그러나 자신의 뒤편에는 계속 무너지는 가족이 있다. 인생이 너무나 서럽고 무섭다. 아니, 그것도 잊었다. 주인공에게 인생 고민이란 사치이다. 이런 그녀에게 모친은 “넌 아직도 내 돈을 다 갚으려면 멀었어. 내가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거야. 절대로.”라고 다. 원수 같은 가족. 이렇게 증오하는데도 같이 살아야 하고 심지어 보살피기까지 해야 한다.


‘철수’는 그녀의 남자 친구다. 그녀와는 다른 세계에 산다. 그에게는 멀쩡한 부모와 집이 있다. 철수는 알바를 할 필요가 없다. 그는 초초하지 않다. 그렇다고 속물도 아니다. 그만하면 괜찮은 남자다. 중산층, 중간쯤 다리를 걸친 남자, 관대한 남자. 일상의 질서를 유지하고 의무를 다하는 사람. 그러나 무의미하고 지루한 삶을 사는 사람.


그녀는 철수가 근무하는 부대를 찾아간다. 코트는 여동생과 공유해야 하므로 얇은 니트로 만족해야 한다. 오늘따라 춥고 눈까지 오지만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철수 어머니가 보내는 치킨을 가져간다. 그녀는 자신을 이리저리 관찰하는 철수네 식구들에 냉소적이다.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철수와 자신은 아무 관계로 아니라고 생각한다.


철수라는 이름은 한 부대에도 이철수 저철수가 여럿이다. 그녀는 추운 겨울날 얇은 카디건 하나로 그녀의 철수를 찾아 헤맨다. 닭다리를 든 채. 철수와 만난 순간, ‘나’는 철수가 그녀를 부끄러워한다는 걸 안다. 그에게조차도 그녀는 지워진다. 처절하다.


아무것도 아닌'나'. 그 흔한 철수들이 무너뜨리는  자존감. 그는 ‘나’의 비참을 안다. 최후로 지켰으면 하는 것. 철수는 그것을 확인시킨다. '나'는 안으로도 밖으로도 초라하다는 것.  '나'는 누추하고 우스꽝스럽다. 철수는 ‘삶의 도식성과 도덕적 우월감’을 보여주고 떠났다.


배수아의 인물들이 다른 세계로 떠난 이유를 알게 된다. 그녀는 포기한다. 이곳의 모든 것이 지겹고 끔찍하다. 여기 있는 ‘나’는 이제부터 다른 곳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선언한다.


철수는 자라서 철수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된다. 나 또한 자라서 나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된다. 그러나 흰 벼랑에서 떨어진 또 다른 철수와 나는 비 오는 빈집의 창밖을 소리 없이 지나갈 것이다. 시간의 시체들 위로 비가 내린다.



세월이 흐른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철수’에서는 내가 아는 수많은 철수들이 소환된다. 익숙한 철수들. 그들은 안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에 관심이 많았지. 그러나 철수가 보여준 '삶의 도식성과 도덕적 우월감'을 갖지 못한 사람들도 이런저런 빈곤감에 시달리는 건 마찬가지다. 주인공도 사실은 '삶의 도식성과 도덕적 우월감' 그런 것을 갖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되어 나는 시간을 살아남았다.


보통은 신포도 유형이 건강에 좋다. 못 가졌으면 일부러 안 가진 걸로 하면 된다. 어떻든 우리는 시간을 살아남는다. 그 시간이 무의미한 거였는지, 의미 있는 거였는지는 각자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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