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일러 쉐리던(1970~) 감독에게 관심이 간다. 그는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2015)와 ‘로스트 인 더스트’(2016)의 각본을 썼고 ‘윈드 리버’(2017)는 각본과 연출까지 맡았다. 세 영화들에서 펼쳐지는 공간, 그 황폐함이 진하게 기억에 남았다. 공간에는착취의흔적이선명하다. 뼛속까지 깊게 파인 상처를 너덜거리며 드러낸 채.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감독 드니 빌뇌브)는 멕시코 국경을 넘어 도망간 마약 조직을 추적하는 CIA와 FBI 대원들의 암투를 그린다. 애리조나 사막과 멕시코 후아레스, 이지대는음산하다. 공포와 죽음을 전시하는 곳. 원칙주의자 FBI 대원, 케이트는 CIA의 불법적인 전략에 이용당한다. CIA의 작전은 대악을 소악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들과 동행한 콜롬비아 남자가 개인적 복수를 위해 마약 카르텔의 보스를 죽이면서 CIA의 작전은 성공한다. 영화는희대의 콜롬비아마약왕 파블로 에스테바르 살해 작전을 연상하게 한다. 케이트는 자신의 역할이 정의를 위한 것이었는지 질문한다. 선과 악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로스트 인 더스트’(감독 데이빗 맥킨지)는 원제가 ‘Hell or High Water’이다. 미국 남부 텍사스. 거친 땅 외에는 가진 것 없는 형제가 주인공이다. 이들이 은행 강도에 나선다. ‘Hell or High Water’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라는 뜻이다. 한국 개봉 제목인 ‘Lost in Dust’은중의적인데좀 더 시적이고 비관적이다. 토비와 태너 형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터무니 없는 은행 빚을 갚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나마 남은 땅을 압수당할 처지다. 은행 강도가 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다짐하는 그들에게 ‘형제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만큼 어울리는 문구도 없다.
두 형제를 뒤쫓는 레인저가 있다. 어수룩한 텍사스 출신 보안관과 그의 인디언 파트너 알베르트다. 인디언 알베르트는 백인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다. 어떤 인디언인들이 그렇지 않겠는가. 처음에는 백인들이, 이제는 그들의 은행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으니. 그러나 알베르트는 형 태너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이 싸움은 켄 로치의 ‘자유로운 세계’(2008)처럼 하층 계급끼리의 투쟁으로 끝나고 말았다. 을의을에 대한 전투인 것이다.
‘윈드 리버’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폐쇄 공포를 다룬다. 와이오밍주 윈드 리버에는 아메리칸 인디언 보호구역이 있다. 윈드 리버라는 이름도 원주민들이 붙인 이름일 것이다. 그들은 시적인 작명에 능하니까. 바람 부는 강. 그러나 이곳은 그다지 낭만적 풍광을 지니지 못했다. 늘 한겨울 같은 을씨년스러운 곳이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사람이 살기 힘든 곳에 강제 정착해 힘든 삶을 이어간다. 야생 동물도 야성을 잃으면 겨우 연명하듯 원주민들 역시 빛났던 과거의 삶을 눈 속에 파묻은 지 오래다.
강력 사건이 일어나도 관할 경찰관의 숫자가 너무 적어 해결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배치된 경찰관의 수도 적지만 파견된 이들조차 지역민들이나 이 지역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행정편의이자 백인 위주 정책 탓으로 소수 부족은 살아가기가 어렵다. 이곳에는 ‘눈과 지루함’만 남았다.
백인들이 인디언들을 학대하고 오도한 역사는 교묘하고 악랄하게 이어져 내려온다. 이곳에 강제로 밀어 넣은 사람들에게 카지노와 같은 타락한 사업을 허용해 준 까닭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다. 스스로 자멸하라는 뜻 아닐까. 콜럼버스 당시 북미 원주민들이 천만 명 이상이었다는데 현재는 삼백만 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500년여간의 살육의 현장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을 뿐이다. 특히 여성 인디언들의 실종, 살해 사건 중에는 해결되지 않은 채 간과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들이 열외 인간으로 취급받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은풍요로움, 군사력, 높은 경제력 등으로 전 세계에 군림해왔다. 사실상 지구의 많은 나라가 미합중국의 우산 밑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강력한 나라가 도덕성까지 갖추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성인군자 제국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강하면 오만해져 남을 경멸하게 되어 있나 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아늘드 토인비의 말대로 거대 제국이 커다란 세균 덩어리, 곰팡이 균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야 감출 수 있었겠지. 그러나 그 종양은 점점 비대해져 드러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정상 세포를 능가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감독은 자국의 문제점을 잘 꿰고 있는 것 같다. 아메리카니즘의 문제를 부끄러움 없이 폭로하기로 작정한 작가다. 그는 위의 국경 삼부작을 완성했다. 그러나 위의 영화에 나타난 텍사스, 애리조나 그리고 와이오밍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전반적인 윤리의식을 재고하려 한다.
테일러 쉐리던의 영화를 보다 보면 코맥 매카시(1933~)에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코맥 매카시의 ‘모두 다 예쁜 말들'(1992), ‘국경을 넘어’(1994), ‘평원의 도시들’(1998)도 국경 3부작이라고 불린다. 이 작가의 국경은 멕시코와 미국 사이 황량한 사막이다. 물리적, 심리적으로 폭력과 넘치는 장소, 만인이 만인에 투쟁하는 무법천지다. 소설을 읽으면 작가의 반-미국 정서를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은 19세기 중반 멕시코 전쟁 초기부터 묵시록적인 악을 선사받았다. '피의 자오선'(1985)의 홀든 판사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 그는 악 그 자체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5)의 살인마 안톤 쉬거도 마찬가지.베트남전 후에도 살아남은 새로운 악마를 위한 변명이다.
테일러 쉐리던은 미국에 할 말이 많다. 그의 영화를 보면 매카시가 그리고자 했던 이 공룡 국가의 잔혹함 그리고 폭력이 가감 없이 반복된다. 다만 대중 영화 각본가이자 감독이어서인지 매카시의 소설에 등장하는 괴물들이 출연하지 않아 그런대로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체제가 낳은 뒤틀어진 괴물을 보는 건 말할 수 없이 우울한 일이다.
두 사람 모두 거대 서사를 꿈꾼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에서 이 나라는 위대함보다는 ‘악의 축’으로 보인다. 예전 미국 대통령은 다른 국가들을 지칭했지만 사실 작가들은 자신의 조국을 ‘axis of evil’로 그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려나. 대규모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곳. 그 용광로가 남들을 꿀꺽하더니 자기 몸까지 삼키려고 붉은 혀를 날름거린다. 이런 나라가 왕년에는 마음씨 좋은 엉클 샘으로 위장하고 있었다니 헛웃음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