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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Sep 07. 2022

단조롭지만 계속

마루야마 겐지, '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를 읽었다. 쓴다는 건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감추는 글은 좋은 글이 아니다. 허구라 해도 작가의 머리에서 나오는 거고, 머리는 간접, 직접 경험의 총체이다. 멋지고, 고상한 내용만 알리려는 건 애초부터 어불성설이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면 그의 강박관념, 도박 버릇, 나쁜 여자들에 취하는 습관, 돈돈돈에 압도당하는 속물 취미에 대해서 알게 된다. 카프카를 읽으면 그의 소심한 분노, 정신적 취약함에 공감하게 된다. 같이 허우적거리다 보면 작가의 내부로 급속하게 접속 된다. 윌리암 포크너는 남부 고딕 전통에 충실하다. 폐쇄공포증, 타부에의 유혹, 머릿속 가득 넘쳐나는 폭력과 증오에 놀라게 된다.     


그래서 글은 사람 그 자체이다. 그렇지 다면 글솜씨가 형편 없거나 속임수가 대단한 사람이다. 내면이 혐오감을 불러일으킬까 두렵다면 글쓰기는 금기사항이 될 수도 있다. 다행히도 글은 한수 접고 들어가므로 직접적인 분노, 두려움, 초조함 등이  어느 정도 물타기를 통해 중화된다.      


글은 스스로 움직이는 유기체여야 한다. 그러나  의도를 형상화시키지 못하 식어버린 죽은 말들의 집합에 볼과하다. 훈련이나 습관이 부족하기 때문일 테지. 위대한 작가들도 매일 일정한 시간 글을 썼다. 쓰다 보면 되는 글, 되지 않는 글이 흘러나온다. 어느 순간은 뭐 이런 글을 쓰나 하는 낭패감도 든다. 그러나 때때로 글이 삶의 수단이자 목적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명상이나 예술도 궁극의 지향점은 한 점 내면으로의 항해이다. 명상을 처음 시작하는 이들도 가상의 한 점을 정한 후 그것에 집중한다. 처음에는 큰 원이었던 것이 점점 작아져서 점으로 나아간다면 행은 보답을 얻은 셈이다. 글도 좋은 명상법이다. 안으로 파고드는 일, 자신과의 씨름, 한 곳에로의 집중, 고밀도로의 항해.      


마루야마 겐지의 글을 읽으면 힘이 넘치고 주관이 분명해 감탄한다. '소설가의 각오'는 1968년부터 1991년까지 결의를 담은 산문집이다. 소설가가 자기 생각을 직설적으로 표현해 공개하는 건 모험일 다. 소설가는 등장인물이나 플롯 등으로 의도를 간접 변주해내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이 에세이들이 공개될 때마다 기성 문단에 준 충격을 짐작하게 된다.


그는 타성에 젖은 평론가, 동료 문인들, 출판사 등을 가리지 않고 비판의 화살을 날린다. 무엇보다 시종일관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한다. 글은 ‘소설가’라는 자기의식 한 곳으로 수렴된다. 독자는 이 에세이들을 무심코 읽다가 나중에는 경외심을 품게 된다.     


이 산문집은 진지한 인간 정신을 느끼게 한다. 굳이 작가라는 특수 직업군에 종사하는 한 인물의 ‘각오’만은 아니다. 어떤 사람의 영혼을 만나다고나 할지. 결국 글이란 작가의 혼이 드러난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곳곳에 영혼의 작은 씨앗을 무수히 뿌려 싹을 틔우고 성장시켜 과실까지 맛보게 한다. 모호하지 않게. 바로 ‘그 작가’라는 선연한 영혼을 드러낸다. 자동으로 기술되어도 그를 통해 나오는 글은 ‘마루야마 겐지’그 자체일 테다. 그는 오리지널리티를 품은 인간이다.     


글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과의 만남이 아닐까. 생각의 적이 이어지고 또 이어져 형상을 만든다. 마치 드로잉을 하는 것 같다. 선을 긋고 톤을 더해 데생을 해 나가듯이. 시각적인 글을 원한다. 마루야마 겐지처럼 이것이 글쓰기의 목표라고 생각해 본다.      


도 작은 일에 분노하고 질투한다. 자기가 하는 일이 늘 의심스럽다. 그러나 그런 인간적 약점을 극복하고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습에 존경을 보낸다.     


몇 부분을 발췌해 보았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 수 없는 것이 분해서 견딜 수가 없다. 산기슭에 살면서 개나 기르고, 소설 따위나 쓰고 양지바른 곳에 웅크리고 있다니, 이렇게 비참하게 살 수밖에 없는가 하는 생각을 할 때마다 화가 치민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서는 펜을 쥔 순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절제된 문장으로 시각적인 소설을 지향한다.     


흥미로운 것은 ‘왜 쓰는가’라는 테마에 들러붙어 성공하는 사람들은 늘 평론가들이고 절대로 소설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소설가가 인생의 숙련자임을 뜻한다는 착각이라도 하고 있는 것인지 지나치게 ‘마음’을 대상으로 한 나머지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정직하게 쓰기만 하면 알아주는 독자가 있을 것이라는 행복한 자세가 오히려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소설을 외면하게 한 것은 아닐까.     


현실을 바라보는 용기를 밑바탕으로 하는 꿈이나 이상이라면 몰라도,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소도구로 문학이 존재한다면 나는 거부하고 싶었다.  

   

여러 소설가와 평론가, 편집자들을 만났다. 그들과 헤어진 뒤 나는 미련 없이 기차에 올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새삼 각오를 다졌다. 나는 내 방식으로,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소설을 쓰면 된다. 산으로 이사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라고.  

   

문학은 읽는 것이며 쓰는 것이지, 논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소설 쓰기를 하는 자는, 문학론 따위와는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해야 한다. 그리고 홀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마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독을 이길 힘이 없다면 문학을 목표로 할 자격이 없다. 세상에 대해 혹은 모든 집단과 조직에 대해 홀로 버틸 대로 버티며 거기서 튕겨 나오는 스파크를 글로 환원해야 한다.     


고독한 길을 인내와 더불어 힘차게 걸어가는 동안, 내가 세운 최종적인 목표는 스스로 선택한 삶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힘을 체득하는 것이었으리라. 우격다짐 같은 말투와 당돌한 행동은  나 자신에 대한 질타인 동시에 격려였는지도 모른다.    

 

문학을 놀이로 보았던 결과가 오늘에 이르러 뒤탈이 나고 만 것인지도 모른다. “문학에는 놀이 정신이 필요하다”는 말은 놀이의 엄격함을 모르는 소치가 아닐 수 없다.     


그날은 하루 종일 개와 함께 눈길을 달리며 자기혐오와 싸웠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이튿날 아침 날이 밝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책상에 앉아 열심히 소설을 썼다. 소설을 쓰는 나, 이것이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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