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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Sep 16. 2022

성숙은 노쇠를 필요로 할까

삼십 세,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성장/교양소설은 주인공이 정신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묘사한다. 유년에서 청년기를 거치며 인물은 갈등을 통해 자신을 내면적으로 형성해 나간다. 여기에는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 성숙과 비례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과연 그럴까. 사람들은 시간과 더불어 변화를 원한다. 긍정적인 변화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시간 흐름, 즉 나이 든다는 건 육체적 성장만이 아니라 정신의 성숙도 의미한다. 그러나 다들 암암리에 알고 있듯이 성장이 성숙과 일치하는 건 아니다.

요아킴 트리에의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2022)는 노르웨이 영화다. 북구 사람들에 대한 신화가 있지만 이런 영화를 보면 그들도 이정표 없이 헤매는 건 마찬가지다. 예전에 같은 성을 가진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헬드 헬드 카메라로 화면을 흔들어댄 반면 이번 트리에 감독은 주인공을 하염없이 방황하게 한다.


주인공 율리에는 29살, 내년부터 본격적인 성인기를 맞이하여 불안감이 증폭된다. 그녀의 과거사는 그다지 낭만적이지도, 성공적이지도 않다. 교양 소설의 정의를 빌어 말한다면 ‘외부와의 갈등 속에 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중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도 본인이 주연 역을 맡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서른 살 그때가 기억난다. 그 나이를 기념하여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삼십 세'를 사서 읽은 기억이 난다. 나도 어제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아 우울했고 내일은 불안했다. 삶에서 뭔가 사라지고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30세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그를 보고 젊다고 부르는 것을 그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그 자신은 일신상 아무런 변화를 찾아낼 수 없다 하더라도, 무엇인가 불안정해져 간다. 스스로를 젊다고 내세우는 게 어색하다.     


율리에는 처음 의대생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치료하고 싶어 전공을 심리학으로 바꾼다. 그다음에는 예술이 맞을 것 같아 사진작가를 꿈꾸었고 곧이어 작가에 도전하려 한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성인이 되면 자신의 갈 길을 주저 없이 걸어가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런, 정반대다. 노선은 불투명하고 방향 감각마저 잃어버린 느낌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영어 제목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처럼 자신을 사상 최악의 인간이라고 부정하고 싶은 마음만 든다.






이즈음 파티에서 악셀이라는 남자를 만난다. 그는 유명 만화가로 40대 중반이다. 악셀은 지적인 데다  포용력도 지녔다. 중년 남자 특유의 안정감도 다. 그녀가 이 남자에게 기대한 건 딱 여기까지. 그다음에는 익숙한 스토리가 펼쳐진다. 알고 보니 이 남자는 진짜 가정을 원한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남들처럼 살고 싶다. 애인을 격려하고 북돋기만 하는 역할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율리에가 기대한 남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 후에 새로 사귄 에이빈드는 젊고 건강하다. 악셀과 달리 아이도 원하지 않는다. 새 애인에게 달려가는 길, 오슬로의 새벽은 들뜬 그녀를 위해 숨을 멈춘다. 그는 커피숍 종업원으로 사람들을 좋아하고 애인을 아낀다. 그러나 율리에는 곧 그도 불만족스럽다. 도무지 지적 호기심이나 야망이라고는 없는 남자다. 평생 카페에서 서빙만 해도 불만이라고는 없을 것 같다. 율리에에게는 이 남자와 헤어질 변명거리가 다.

보통 성장 소설에 등장하는 조연들은 자기들의 몫이 크지 않다.  그저 주인공의 성장을 위해 맡은 역할이나 잘 해내면 되는 거다. 그리고는 무대를 내려와 사라진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두 남자는 자기들을 위해서도 보답을 받았다. 악셀의 병과 죽음, 에이빈드의 새가정은 그들 본인을 위해서도 성숙의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이 공부, 저 공부를 했다. 이 남자, 저 남자도 사귀어 봤다. 외부 자극은 그녀에게 평화를 주지 못했다. 방향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홀로 선다. 자신에게 말을 걸고 또 듣는다. 율리에는 고투 끝에 본연의 제 모습을 찾아간다. 그녀의 눈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깊고 넓어진다. 지극히 성장 영화다운 결론이다. 삶은 작년보다 낫고 어제보다 풍성하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시간이나 외부의 힘이 인간의 자기 형성을 가능하게 한다는 시각이 있었다. 꼭 그런 건만은 아닐 것이다. 젊은 현자와 나이 든 미성숙자도 있는 법이니까. 인간의 성숙은 연령의 노쇠만을 요구하는  아니다. 주체는 외부와 내부의 밀고 당김을 제대로 인지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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