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2020)를 읽는 중에 ‘썬 다운’(2022)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인물들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한쪽은 공허를 응시하는 반면, 다른 쪽은 완전을 추구한다.
‘썬 다운’은 죽음에 대한 영화다. 닐의 이상한 행동은 벼랑 끝에 선 자의 태평과 허무를 반영한다. 지는 해를 중천까지 다시 들어 올릴 수는 없다. 닐은 그 태양이 기울도록 그대로 둔다. 그것밖에는 할 일도 없으니까. 해변의 한낮은 눈을 뜨기 어렵다. 해는 바다와 모래를 흰빛으로 끓게 한다. 태양은 적의를 품은 채 닐을 소외시킨다. 그는 이방인이다.
영화는 그물에 걸린 생선들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바닷속에서 활기차게 뛰놀았던 물고기들은 어느 날 느닷없이 그물에 걸렸고 마지막 숨을 몰아쉰다. 그들은 곧 세상에서 사라질 테다. 닐은 모든 생명체의 운명이라 할 생과 사를 들여다본다. 이유 없이 생겨났다가 갑자기 사라져야 하는.
닐과 앨리스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다. 닐은 여동생 앨리스 가족과 멕시코 바닷가에서 휴가를 즐기는 중이다. 그는 침묵하고 침잠한다. 주변에 초연하다. 바깥은 그의 안중에 없다.
이들 남매의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일행은 영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닐은 핑계를 대고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 모친은 오늘이나 내일, 아니 언제든 사망할 것이다. 그는 무관심하다. 어머니는 어머니, 나는 나. 카뮈의 ‘이방인’(1942), 뫼르소나 다름없다.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가 온 것이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닐은 새로 사귄 멕시코 여자와 정열을 불태운다. 장례식 다음 날, 뫼르소가 마리와 정사를 벌인 것처럼.
혼자서 장례 절차를 치른 앨리스가 찾아왔다. 그녀는 닐에게 화가 나 있다. 그는 여기에 대한 답으로 상속 포기를 선언한다.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은 행위를 무마시키려는 건가. 권리를 갖지 않겠으니 의무도 강제하지 말라. 더 이상 가두려 하지 말라.
이런 오빠를 둔 동생이라면 분노로 치가 떨릴 만도 하겠지. 앨리스는 이제 닐과 절연을 할 것이다. 공항으로 향하는 길. 닐과 안면 있는 멕시코인이 앨리스의 자동차를 향해 총을 난사한다. 그는 차량 강도를 노린다. 앨리스는 차 안에서 사망하고 닐은 배후 인물로 멕시코 교도소에 수감된다. ‘이방인’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건 여기까지다.
뫼르소는 아랍인을 살해한 죄로 사형 언도를 받지만 닐은 무죄 석방된다. 그는 멕시코 여자와 거리낌 없이 사랑을 나눈다. 열대의 태양은 타오르고 이 순간 사랑만은 진실이다.나머지는부질없다.
뫼르소는 살인사건으로 재판을 받으면서 구경하는 이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서로 친숙하다. 뫼르소만이 이방인이다. 그는 타인과 어떤 의미도 공유하지 못하는 고독한 존재다.
그때 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아는 얼굴을 찾아 말을 건네고 대화를 나누는 게 마치 같은 세계에 속한 사람들끼리 서로 만나 즐거운, 무슨 클럽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 안에 이방인이며 왠지 침입자 같았다.
뫼르소는 심연에서 방황한다. 누군가와 고독을 나누고 싶지 않다. 뫼르소가 느끼는 절망의 실체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던져졌다가 거두어지는 삶의 유한함에 진저리치는 걸 안다. 우리도 같은 존재이므로 격하게 공감한다.
‘썬 다운’의 미셸 프랑코 감독은 이런 면에서 지나치게 친절하다. 관객은 자질구레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닐의 이상 행위를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았어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닐이 불치병에 걸렸음을 알려준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장례식에 가지 않았고 상속도 포기해 가족들과 관계를 끝냈다. 곧 죽음을 맞을 것이므로 아무 미련이 없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2020)의 저자, 룰루 밀러는 일곱 살 무렵 부친에게 인생의 의미가 뭐냐고 물었다. 그는 딸에게 혼돈만이 우리의 지배자라고 알려 준다.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그리고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고 자신도 의미가 없다는 무시무시한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낸 것일 뿐이니까. 진실은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란다.
아이는 이불을 빼앗긴 느낌을 받는다. 그 안에서 포근하고 안전했다고 믿은 그 이불은 가짜였다. 힘의 거대한 소용돌이만이 우리를 만들고 파괴한다. 혼돈의 세계를 산다고 인식하는 이들은 뫼르소와 닐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작가가 그리고자 한 인물은 뫼르소나 닐과는 하늘땅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그는 19세기 말의 미국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1851~1931)이다. 조던은 낙천성의 방패를 가지고 있는 사나이다. 그는 자기 손으로 혼돈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특유의 인생관과 자기기만은 이 생물학자의 앞날에 ‘영광’을 드리운다.
조던은 존경할 만한 면이 많은 인물이다. ‘숨어있는 보잘것없는 꽃들에 대한 몰두, 강철 같은 근성, 그 어떤 불운이 닥쳐와도 주저앉기를 거부하던 그 투지 넘치는 결연함’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자신감이 치명적인 부패를 부른 건 아닐까.
조던은 정신적·육체적 장애를 가진 이들의 마을을 방문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마을이 새로운 인간 종으로의 퇴화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쇠퇴를 예방하는 방법으로 ‘백치들을 몰살하는 것을 권고’하는 책을 집필한다. ‘우생학’이라는 단어는 그 후 미국 전역에 널리 보급된다.
그도 ‘의심’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혼돈이 두려웠다. 이유도 근거도 없이 함부로 생성, 소멸시키는 힘이기에. 확신에 찬 조던은 자기 방식이 지닌 오류를 직시하지 않는다. 인류가 쇠퇴하고 있다면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고 인류를 구출해야 한다는 소명을 향해 나아갔다.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의지라고 착각한다. 자연의 사다리, 신성한 계층구조를 놓아버리는 건 삶을 회오리로 휩쓸리게 하는 거나 다름없다. 질서 잃은 인간은 방향 감각을 놓친다는 믿음이다.
근대 이후의 사람들은 생물을 분류하고 범주화하기를 좋아했다. 우리 인간을 자연계의 영장으로 만들기에 적합한 방법이었이니까. 그러나 작가는 과학계에서는 이미 어류라는 분류 체계가사라졌음을 확인한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평생 해왔던 어류 분류는 무의미한 일이 되었다. 잔해만이 남았다. 혼돈이 삼켰다.
다원주의, 상대주의이라는 용어를 자주 듣는다. 과거의 질서, 순서가 흐물흐물해지면서 전체 구조도 점점 희미해진다. 닐이나 뫼르소는 진실을 안다. 세계를 의심하고 직시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삶이 부조리하다는 걸 인식한다. 그러나 너무 늦게 각성을 한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반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노력은 무위가 되었다. 그 노력의 지향점마저 비윤리적이었다. 이런 날은 쇼펜하우어나 니체를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