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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Oct 11. 2022

하루키 풍

때늦은 감탄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거장이다. 그의 소설을 일컬어 대중 문학이다, 선정적이다, 주제를 알 수 없다, 허무주의를 선동한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등을 언급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렇지만 이 모두가 하루키라는 작가의 개성이다. 그 자체가 하루키다.


인물들은 바닥에 발을 딛지 못했다. 그들은 이 공간에서 거세되어 다른 세상으로 강제 이송된다. 고작 주어진대로 순응하는 초식동물이다. 매력적이었지만 실존을 위해 투쟁하는 이들은 아니었다. 그런 인물군을 거느린 하루키를 사랑했었다. 그러던 하루키가 서서히 변해간다. 어느덧 하루키는 자기 낭만에 취한 이들만이 아니라 역사와 공동체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 이들의 대부가 되어간다.           


80년대 후반 지금은 '노르웨이의 숲'으로 제목이 바뀐 '상실의 시대'를 읽었다. '상실의 시대'(1987)의 하루키는 지금과는 다른 작가로 여겨졌다. 흥미진진한 변화다. 그 소설은 청춘연가다. 그 후에 출간된 하루키 풍과도 다르다. 소설의 아련한 쓸쓸함, 공허감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키 작은 풀들이 바람에 잔물결 치는 어느 들판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청춘 특유의 감성을 문장으로 확인하고 공감한다는 건 대단한 즐거움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트란 안 홍이 '노르웨이의 숲'(2011)을 영화화하자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개봉 조조를 보러 가자마자 나만의 와타나베, 나오코, 미도리가 사라진 걸 확인했다. 트란 안 홍이 감수성의 대가이기는 하지만 잘 알려진 문학 작품을 영화화한다는 건 역시 모험이다.  







80년대는 여느 시대처럼 힘들었다. 드러내야 하고 보여줘야 했다. 국가, 공익, 전체와 같은 강렬한 외침이 세상을 좌우했다. 일본은 훨씬 전, 60년대 후반에 전공투 세대의 안보 투쟁이 있었고 싸웠으나 무너졌다. 하루키는 예전부터 '아름다운 말로 강력하게 말하는 일은 일단 신용하지 말라'는 말을 신조로 삼고 있었다. 그는 카페에서 재즈음악을 틀고 음료를 팔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일종의 패배의식 혹은 무심함의 발로라 하겠지. 혁신하려고 했지만 좌절했고 그 끝은 공허가 메우고 있었다. 90년대에 막 들어선 우리와 비슷했다. 내면으로 조용하게 돌아가고 싶었다. 집단적인 것 말고도 다른 가치도 있어야 했다.


하루키가 그때 도착했다. 모두 열광했다. 그 10년은 하루키가 문학 서고의 한축을 담당했다. 늘 새 책이 번역되어 전시장 매대를 장식했다. 그걸 왜 읽었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궁색하다. 하루키식 세계에 공감하는 면이 있어서라는 뻔한 답만이 떠오른다. 오래전에 나온 쥐 3부작(1979~1982)이나 '댄스 댄스 댄스'(1988)를 읽으면서 놀라기도 했지만 책 읽는 재미에도 푹 빠졌던 기억이 난다. 이런 스토리가 다 있구나. 리얼리즘도 아니고 황당무계한 거짓말이 이렇게 촘촘하고 정교하다니. 예전에는 초현실주의 작품들도 뭔가 할 말을 하려는 경우가 많았다. 하고 싶은 말, 이 작가의 소설에는 그게 잘 보이지 않았다.


하루키는 '소설(이야기)은 그런 단편적인 사고에 대항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목적을 품되 목적을 능가하는 (혹은 지워버리는) 것이 아무리 어려울지라고도 이런 시도에 꼭 도전해야 하고, 할 수 있다면, 그 안에서 모든 이가 공유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구축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런 문학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뻔히 들여다보이는 흑백논리의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는다. 그러니 난생 처음 이런 작품을 읽은 독자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초기 주인공들은 주로 젊은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별 잘못도 없이 이 공간에 거주할 자격을 잃는다. 예전 인물들이라면 항의하고 대결해서 결판을 내려했을 것이다. 카프카가 쓴 '소송'의 요제프 K조차 자신이 체포된 원인을 캐기 위해 그 많은 관청과 법원을 헤매다닌다. 반면'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와 '태엽 감는 새'(1994)의 인물들은 포기한다. 그들은 얌전하게 죽음이나 무의식으로 떠난다. 전통적인 남성성이라고는 털끝만치도 없는 유니섹스 스타일의 남자들은 그저 다른 공간으로 떠난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호한 이야기들이지만 상당히 유혹적이어서 끊임없이 사람을 손짓한다. 하루키가 젊은 시절에 쓴 인물들이어서인지 남자들은 섹시하고 로맨틱하다. 지금도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공원에 누워 세상의 끝으로 떠나기를 기다리는 주인공 '나'를 누구보다 낭만적이라고 생각한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하루키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다. 주인공 '나'는 '기나긴 이별'(1953)의 필립 말로처럼 무심한 척 하지만 가슴에는 비가 내린다.  


층과 층 사이, 우물 부근 혹은 지하 어딘가에 감춰진 곳이 있다. 신화가 그리운 사람들이 아직 많으니까. 다 밝혀지면 이 세상이 너무 남루하지 않나. 모르는 곳, 미지의 세상이 어느 한편에 있고 그곳에서도 어떤 일인가가 일어난다. 누군가 마음 가볍고 세상에 발이 붕 떠 부유하는 이가 있다면 이곳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을 것이다. 요정, 도깨비들, 작은 사람들이 그곳에 산다. 그들은 악의적으로 때로는 선한 의도로 인간 세상에 접근하려 한다. 인간에게 뭔가 할 말이 있다. 해야 할 말, 들어야 할 말은 크고 단단한 덩어리가 되어 현실을 공격한다.


하루키 소설에는 일본인다운 선명한 표현이 자주 등장해 몸을 떨게 한다.'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1992)성애 장면이 그토록 리얼할 필요가 있을까. 공허한 마음은 에로스를 타나토로 이끈다. 사랑도 포르노처럼 음란하다. 사람 죽이는 일도 탐미적으로 묘사한다. '태엽 감는 새'에서 노몬한 전투에 참가한 군인이 포로를 살해하는 장면은 공포스럽다. 그는 왜 이렇게 외설적이면서 끔찍한 장면에 몰입했을까. 잔인한 심장이여.


 하루키는 끝까지 파보려 했던 것 같다. 인간의 저 아래까지 내려가 본다. 일본의 검은 인개는 어디로부터 왔을까. 자신들의 과거로부터 스멀스멀 밀려왔을 것이다. '태엽감는 새'에서 철수를 명령받은 만주국의 수의사는 동물원에서 키우던 동물들을 대량으로 죽여야 한다. '해변의 카프카'(2002)에서는 태평양 전쟁에 징집된 일본 군인들이 집단 탈영해 다른 차원에서 머무는 장면이 나온다. '기사단장 이야기'(2017)에서도 '난징 대학살'이 언급된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죽이는 것만도 아니다. 그들은 천인 공로할 만행을 저질렀다. 하루키는 자신의 아버지도 중일전쟁에 참전해 중국인 포로를 처형한 일을 밝혔다. 작가는 사회를 향한 목소리를 점점 크게 내려고 한다. 옴진리교 사린 테러를 겪은 일본 사회를 경고하는 의미에서 쓴 소설이 '1Q84'(2009)이다. 


'태엽 감는 새'에서 작가는 명료하게 발언한다. 다들 서로에게 책임 있다.    


운명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제 몫을 챙겨가고 그 몫을 손에 넣을 때까지는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감추어져 있던 진실이 어딘가에 무섭게 살아있다. 진실은 감출 수 없다. 어느 때가 되면 영화 '링'(1998)의 소녀처럼 현실로 돌아올 것이다. 하루키는 영미계열 작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 작가 또한 지극히 동북아적 색채가 농후하다는 걸 깨닫는. 세상 사람들은 관계로 맺어져 있다. 나 혼자만을 위해서 잘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옆집이나 뒷집 사람에게도 잘해야 한다. 그들 또한 보이지 않는 손으로  크고 작은 행운을 선사하거나 상처를 줄 것이다. 지금 현재만이 아니고 오래전 조상들의 삶 또한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렇다 보니 내가 지금 큰 잘못이 없다 해도 벌을 받을 수 있다. 사람들은 그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하루키의 최근 작 '고양이를 버리다'(2020)에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나는 구절이 있다.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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