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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03. 2022

균열 속에 잠겨

세일즈맨의 죽음, 세일즈맨

아쉬가르 파라디의 영화를 몇 개 보았다. 딜레마를 다루는데 아주 능했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페르시아인의 후예답게 뛰어난 스토리텔러다. 이란 감독하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자파르 파니히가 떠오르는데 여기에 아쉬가르 파라디까지 보태야겠다. 이란은 외부로의 문을 거의 닫은 나라로 보이지만 이런 감독들의 영화 덕에 그 안에 사는 인간을 느끼게 한다. ‘세일즈맨’(2016)은 칸영화제 각본상,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각본에 현대의 위기, 윤리적 딜레마. 이란 사회의 불합리성 등이 잘 드러나 있다.      


영화는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1949)과 병립하고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세일즈맨’과‘세일즈맨의 죽음’을 보면 세상이 복잡하고 불합리하며 울분에 잠길만한 일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대사를 중얼거리게 한다. 그러나 인물들은 딜레마를 박차고 나갈 수도 없다.  

      

‘세일즈맨’의 주인공 에마드는 가족은 물론 타인에게도 늘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지성인이다. 그는 문학 교사이자 배우로 현재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준비 중이다.  에마드는 ‘세일즈 맨의 죽음’의 등장인물 윌리의 대사를 빌어 자신을 전달한다. 윌리의 부조리한 상황은 에마드의 현실 세계를 비춘다. 그래서 영화는 연극에 대한 연극, 메타 연극일 수 있다. 연극 속의 삶은 일상에서도 변주, 반복한다. 형식만이 약간씩 달라진다. 그래서 에마드 입장에서만 살필 필요도 없다. 누구든 윌리가 될 수도 있을 터이다.      


에마드와 라나 부부가 사는 아파트 옆에서는 지반공사가 한창 중이다. 어느 날 작업하는 크레인 기사의 실수로 아파트가 무너질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균열로 금이 간 집은 국가, 사회, 가정, 부부관계 그리고 개인의 윤리의식까지도 파국으로 내려앉을 위기임을 짐작하게 한다. 굳건한 듯 보이는 세상의 법이나 가정이라는 울타리, 확고한 가치관이나 기준도 언제든 그럴 가능성이 있다.      


에마드 부부는 지인의 도움으로 잠시 새집으로 이사 간다. 퇴근 후 돌아온 어느 날 그는 아내가 샤워 중 폭행을 당해 병원으로 실려 갔음을 알게 된다. 라나는 응급실로 후송되었으나 누가 자신을 공격했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현자에 가까웠던 에마드는 점점 예민해진다. 학교나 길거리, 연습실화날 일 투성이다.    

 

영화의 핵심은 사적 복수의 정당성이다. 에마드는 집에 쳐들어왔던 강간 미수범을 힘들여 찾아낸다. 그런데 범인이라고 애써 찾아낸 인물이 혈기왕성한 젊은이도 아닌 초로의 환자임을 알게 된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심장병 환자다. 에마드는 바라만 보아도 안쓰러운 노인을 향한 복수가 정당한지 스스로도 의문이다. 답이 보이지 않는다.      


성폭행을 시도한 노인이야말로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에 나오는 그 윌리를 닮았다. 가족을 위해서 헌신했지만 세월에, 상황에 스스로 배신당하는 역할이다. 한때 윌리는 잘 나가는 세일즈맨였지만 내연의 여자를 둔 적이 있었다. 집안의 기대주였던 큰 아들은 아버지의 불륜을 알게 된 후 좌절해 장래를 망쳐 버린다.      


폭행 미수범 노인도 성실하고 다정한 남자였다. 자기 나름으로는 열심히 가족을 부양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비밀, 그의 사생활이 밝혀질 위기에 처한다. 그는 에마드 새 아파트의 전 거주자였던 매춘부 집을 정기적으로 방문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노인은 애인 집의 열쇠도 가지고 있어 들어왔다가 샤워하는 라나와 마주친 것이다. 둘은 낯선 자와 격렬하게 싸웠다.


윌리가 큰 아들에게 들켰듯이 노인 또한 평생의 자랑거리가 와르르 무너질 위기에 처한다.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 그것이 노출될까 봐 두렵다. 누군가 살짝 밀기만 해도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질 만큼 내부가 허약하다. 노인은 안절부절못한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는 스스로의 심리적 압박으로 쓰러진다. 결국 노인은 응급실로 실려가고 에마드는 망연자실한다. 한바탕 보복은 해주었지만 그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회한, 후회에서 자유롭지 못한다. 라나는 이런 보복을 벌인 남편에 실망한다. 집 곳곳에 난 균열처럼 부부 역시 기로에 선다.     


‘세일즈맨의 죽음’의 주인공 윌리는 현재가 암울하다는 걸 안다. 되는 일이 없다. 빚, 차 사고, 실직, 암담한 자식들의 미래. 그러나 환상이라면 자신이 있다.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밝게 빛난다.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부자가 됐다는 형도 손짓한다. 그러나 깨어나보니 진짜 삶은 거짓말로 쌓아 올린 탑이다. 이걸 깨닫는 순간 윌리는 저 높은 탑에서 추락해 현실에서 사라져야 한다.   


영화는 교묘하게 짜인 그물과 같다. 강간 미수범 노인이야말로 에마드가 연기하는 윌리다. 에마드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윌리를 연기한다. 그는 연극에서 진정한 윌리가 된다. 세상에 배신당하는 처절한 윌리. 에마드는 윌리를 내면에서 받아들인다. 깊숙하게 이해한다. 그러나 에마드가 진짜 윌리를 현실에서 만나는 순간, 동질 의식보다는 분노로 몸을 떨게 된다. 그는 기꺼이 증오의 화살을 겨눈다. 이제 윌리는 작품 안에서나 밖에서나 견딜 수가 없다. 연극 속 윌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작품 바깥의 윌리도 복수의 대상이 된다.      


영화 속 이란이라는 나라는 이 작품의 시공간으로 안성맞춤이다. 윌리를 둘러싼 현실처럼 갈등의 틈새가 점점 넓어져 도저히 봉합될 수 없는 곳이다. 낡은 아파트를 부수고 또 값싸게 짓는 방식은 모순 위에 모순을 쌓는 식이다. 이 땅에서도 익숙하게 보아온 전시 행정을 남발한다. 내부가 튼튼한 건 잘 보이지 않는다. 겉으로만 멀쩡하면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러나 그곳에 들어가 잠시만 살아도 체제의 문제점이 하나 둘 나타날 것이다. 이런 겉치레에 익숙한 들은 좌절감이나 패배 의식이 뼛속 깊이 자리 잡는다. 사람들은 불행과 친숙하다. 전체주의 사회는 이렇게 귀결되기 쉽다.      


외부인 입장에서 보자면 주거 침입자를 고발하는 것이 백번 마땅하다. 그러나 에마드 부부는 머뭇거린다. 이웃들도 권하지 않는다. 강간범인 남성보다도 피해자 여성에게 돌아올 따가운 눈총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구조이므로 사람들은 사적 복수를 정당화한다.


이 영화는 외부인에게는 특수하지만 어떤 사회에서는 일반적인 개인적 보복을 다룬다. 그러나 그 결과로 노인은 죽음에 이르고 쌓아올린 존경을 단번에 잃는다. 한 사람이 명예를 잃고 수치심에 빠져 죽는다는 것. 보잘것없는 노인에게 가해진 이 상황은 누군가에게는 희극적으로 보이지만 노인 본인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끔찍한 형벌이다. 진보적 지식인으로 열린 사고를 갖춘 에마드 또한 휘청인다. 정의는 어디로 간 걸까. 모든 일이 모호해진다.    

   

에마드는 이중성에 휩싸인다. 그는 자신이 연기하는 윌리처럼 진실에 닿는 순간 삶으로부터 추방될 위기에 놓인다. 환상은 아름답지만 진실은 종종 그와 반대다. 눈을 뜨고 냉철하게 바라본다. 그는 금이 가 무너질 듯한 구조물 안에 자신이 포박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여기서 나가 그를 감싸고 있던 것들을 집어던질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의 월리처럼 거짓과 환상, 꿈을 벗어버리면 남는 게 없다. 다들 그걸 안다. 어쩌면 삶은 환상, 그것이 이런 사회의 끔찍한 전제조건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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