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 커쇼의 ‘유럽 1914~1949’(2015)는 20세기 전반부를 다루고 있으니 전쟁사나 마찬가지다. 유럽은 두 차례의 전쟁과 그 뒤처리로 갚아야 할 결산 내역을 길게 남긴다. 지배적 위치도 미국에 넘길 수밖에 없었다.
1차 대전 이전부터 유럽의 정치인들은 국가를 대중화하는 가장 편리한 방법으로 민족주의를 이용했다. 유럽의 지배 엘리트에게 민족주의는 사회주의만큼 위험한 건 아니었다. 대중매체는 인종주의적인 적개심을 자극했고 정부는 부추겼다. 광신적인 민족주의 감정을 북돋아서 투쟁과 희생을 강조하고 반사회주의, 공세적인 대외 정책을 옹호했다. 민족주의는 국가를 영토가 아닌 민족으로 정의하는 경향이 있었다. 국경이 있어도 타민족이 다수가 되면 언젠가 영토를 주장할 정당성을 갖추는 거나 마찬가지다. 열강 사이의 힘의 대결은 전쟁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기에 적절했다. 각국은 화해 불가능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외교적으로는 벼랑 끝 전술을 펼치고 있었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자국 영토 안에서는 인종주의, 반유대주의가 횡행했고 식민지에서도 학대를 일삼았다. 유럽 곳곳에서 전쟁에 대한 열광적 태도, 환희가 넘쳤다. 동시대의 이탈리아 ‘미래주의’는 ‘우리는 세계에서 위생의 유일한 원천인 전쟁을, 즉 군국주의와 애국주의와 파괴 행위를 찬미하고 싶다’고 선언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러시아 제국 그리고 영국, 프랑스 등은 각각 전쟁에 돌입할 각각의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머지 않아 두려움, 위신, 명예, 야망으로 가득 찬 오판이었음이 드러난다. 1차 대전은 산업화된 대량 살육전으로 인간 육체가 살인 기계와 맞붙은 최초의 전쟁이었다.
전쟁 피해 목록은 건조하다. 사망 군인은 거의 900만 명, 민간인은 600만 명, 포로는 약 700만 명이라고 한다. 숫자는 개인의 울음을 말하지 않는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떤 욕망을 위해 사라져 갔을까. 1916년 전사한 프랑스 군인은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이 살육의 목적을 알고 싶어서 묻는다. 내가 듣는 답변은 '조국을 위해!'다. 하지만 왜 그런지 이유는 알지 못한다.’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의 남편이나 애인이 아무도 알 수 없는 추상적 이상을 위해 죽어갔다.
장 마리 스트로브, 다니엘 위예 부부가 감독한 ‘화해불가’(1965)라는 영화가 있었다. 가슴속에 맺힌 원한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피상적인 적도 아니고 내 눈앞에 원수가 나타났다고 가정해보자. 대부분은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선이 있다고 여길 것이다. ‘화해불가’에서는 어느 날, 그 원수를 총으로 탕 쏘고 끝낸다. 남들은 잊었겠지, 이제 용서하겠지 생각하겠지만 피해 당사자는 잊은 적이 없다. 화해는 쉽지 않다. 그래서 증오는 남고 전쟁은 계속된다.
‘프란츠’(2016)는 프랑소아 오종의 영화이다. 프란츠는 1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죽은 독일인 청년이다. 이 독일 청년은 전쟁터에서 죽었고 독일 가족은 집 부근에 가묘를 만들어 그를 추억해왔다. 어느 날 프란츠의 무덤에 꽃이 놓이기 시작한다. 가족들은 아드리앵이라는 프랑스 남자가 프란츠를 기린다는 걸 알게 된다. 아드리앵은 본인을 전쟁 전부터 알고 지내던 프란츠의 친구라고 소개한다.
안나는 프란츠의 약혼녀다. 겨우 심리적으로안정감을 가질 즈음 이 프랑스 남자를 알게 된다. 그런데 아드리앵의 행동이 자못 의심스럽다. 그는 프란츠의 친구가 맞을까? 그 둘은 알기나 하던 사이일까? 아드리앵도 프란츠의 섬세한 면을 갖고 있기는 하다. 그 둘은 마네의 작품 ‘자살’(1877~1881)을 함께 보았고 쇼팽과베를렌느에 공감했다고 한다.
프란츠의 부친 호프마이스터 박사와 안나는 아드리앵이 하는 말에 의심을 품었지만 차라리 믿고 싶다. 안나는 이 남자를 사랑하기까지 한다. 사랑해도 될까? 프랑스와 독일, 적국의 두 남녀가 화해를 떠나 사랑까지 해도 될지.
호프마이스터 박사는 아들과 닮은 아드리앵을 향해 조심스럽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인다. 전선에서 죽은 아들들을 가진 부친들이 모여 호전적인 보복을 다짐하던 시절이다. 독일 아버지들은 프랑스로 쳐들어가 적을 죽이자고 손을 맞잡는다. 그러나 박사는 아버지들이야말로 아들들을 전선으로 보내 죽인 자들이라는 걸 안다. 그는 프랑스 아버지들 또한 더 많은 독일인들을 죽이자고 서로를 격려하고 있다는 걸 안다. 이제 화해할 때가 되었다. 물론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프란츠의 아버지와 같은 통찰력을 갖춘 건 아니다.
프란츠의 부친조차 아드리앵이 프란츠의 친구가 아니라 아들을 죽인 프랑스 군인인 것을 알았더라면 살려서 보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거기까지는 아니다. 아들은 죽인 자는 낯 모르는 어떤 적군이라고 여기는 편이 낫다. 눈앞에 있는 저 남자가 내 아들을 죽였는데 다 받아들이라는 건 인간을 너무 위대하게 보든가, 너무 얕잡아보는 거다.
안나는 프란츠를 잃은 데다가 아드리앵까지도 떠나버려 그 공허를 견딜 수 없다. 죽고 싶지만 이것도 쉽지 않다. 프란츠의 부모는 아드리앵과 안나의 사랑을 응원하기로 한다. 이제 그녀는 사랑을 찾기 위해, 심지어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를 위해 떠난다. 파리에는 환락, 거짓말, 배신이 있었다. 아드리앵이프란츠와 같이 마네의 '자살'을 봤다는 거짓말까지지어낸 이유는 무엇일까?
<에두아르 마네, 자살(1877~1881)>
‘자살’에는 한 남자가 얼굴을 천정으로 향한 채 침대에 벌렁 쓰러져 누워 있다. 그의 오른손에는 권총이 있고 침대는 온통 핏빛인 듯 붉게 물들어 있다. 그는 왜 죽었을까. 사랑, 치정, 도박, 궁핍, 낙선.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남자는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채 스스로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는 삶을 마감했다.
안나는 전쟁 후 양국 사람들의 국수주의를 보았다. 외국인 혐오를 겪었다. 술집에 모인 프랑스 남자들은 더 이상 장엄할 수 없이 ‘라 마르세예즈’를 불렀다. 장화가 피로 물들 때까지 복수를 하겠다고 야단이다.
마네의 ‘자살’은 프란츠가 죽은 이유를떠올리게 한다. 전쟁에 나간 병사가 총알도 장전하지 않은 채 전투에 나섰으니까. 그를 쏜 아드리앵은 나중에야 자신과 맞닥뜨린 독일 병사가 빈총을 겨눴다는 걸 안다. 그는 자신이 수치스럽다. 아드리앵은 이 독일 남자를 추모하고 그의 가족에게 용서를 빌고 싶은 마음에 독일행을 감행했다.
안나는 아드리앵을 찾아간다. 그 둘은 서로를 원하고 있음을 안다. 둘만이 완벽한 사랑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드리앵에게는 이미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다. 안나는 쓸쓸하게 돌아선다. 두 사람은 현실에서는 이 사랑이 지속될 수 없음을 안다. 그 두 사람은 어떤 힘의 방해로 결합할 수 없다. 프랑스와 독일 두 열강은 끝내 화해하지 못한다.
1차 대전이 종료되고 겨우 한 세대 만에 유럽은 다시 전쟁의 구렁텅이를 향해 달려간다. 1939년 히틀러는 군사령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상황에 적응할 수 있으니 문제 해결을 회피할 수 있다는 신조가 팽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상황이 그 요구에 맞도록 조정되어야 한다. 이것은 다른 나라로 쳐들어가거나 다른 민족의 소유물을 공격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
인간이란 폭력이나 광기를 주기적으로 발산해야 하는 존재인지 의심스럽다. 그것을 거부하는 프란츠 같은 평화주의자에게는 삶이 버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