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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파르헤시아(Parrhesia)

미디어의 파르헤시아

by BEANS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가 등장한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는 아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듣고 오이디푸스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서 버려졌다. 성인이 된 그는 테베로 오게 되고 오는 길에 한 노인, 즉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게 된다. 그는 신탁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테베의 왕이 되어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었다. 테베에 역병이 돌자 선왕을 죽인 사람을 찾아 추방하라는 신탁을 듣고 오이디푸스는 살인자를 찾아 나선다. 눈먼 예언자는 이를 중지할 것을 요청하지만 오이디푸스는 그의 말을 거부하였고,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후 그는 자신의 눈을 찔러 영원히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때 눈먼 예언자가 오이디푸스에게 전하려 했던 말은 무엇일까? 입에 쓰지만 진실인 파르헤시아가 아닐까? “파르헤시아(Parrhesia)”란 영어로 번역하면 Free speech이다. 쓴소리이지만 진실을 말하는 것을 파르헤시아라고 한다. 그것이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마주하기 힘든 진실이기에 파르헤시아는 어렵고 복잡하다. 마주하기 힘든 진실을 밝히는 파르헤시아는 우리의 소통에 있어 절실히 필요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불편한 진실을 끄집어내는 파르헤시아는 소통에 있어 바른 덕목과 자세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을 하자면 사람들은 모두 상반된 대답을 할 것이다. 숨기고 싶고 불편한 진실을 폭로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르헤시아는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필요한 존재이다.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정직하고 바른 커뮤니케이션은 없기 때문이다. 불편한 진실은 우리 스스로를 반성하게 만들고 걸어온 길을 돌아보게 만든다.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던 일을 되잡을 수 있는 기회이며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자각할 수 있는 소통 방식이다. 그렇기에 파르헤시아는 필요하지 않지만 필요한, 모순적인 의미를 지닌다.


l 미디어의 파르헤시아-뉴스

파르헤시아는 지도자와 대중 모두에게 필요하다. 대중은 지도자에게 파르헤시아를 내뱉을 줄 알아야 하며 지도자는 대중들에게 파르헤시아를 통해 일깨워줄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파르헤시아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곳이 바로 뉴스, 즉 언론이다. 언론은 항상 진실에 근거하여 국가 권력과 국민이 소통할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뉴스에서 파르헤시아가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늘 뜨거운 토론의 화두였다. 진실과 거짓에 있어 언론이 중요한 이유는 대중들에게 있어 언론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언론에 보도되는 내용은 모두 거짓 없는 진실이며 언론에 보도되는 것만이 살아남은 진실이라 인식한다. 언론이 강조하는 문제는 대중들에게 더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사건이 점화되며, 개인의 인식에 있어 틀이 되기 때문이다.

빠른 기술의 발전으로 새로운 형태의 뉴스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가짜 뉴스, 근거 없는 추측성의 보도, 편파적 뉴스 등 뉴스의 질이 하락하는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신뢰성을 잃은 뉴스가 국민들에게 파르헤시아의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매우 모순적인 측면이다. 또 포털의 등장으로 대중들은 뉴스를 선택적으로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자신이 속하거나 자신의 태도와 일치하는 뉴스를 선택적으로 골라 소비해 진정한 언론의 파르헤시아의 역할을 접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언론의 파르헤시아는 대중들에게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를 야기하는 문제를 가져올 수 있다. 언론의 보도를 선택적으로 소비할 수 있게 되면서 더욱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보도 내용만이 살아남았다. 자연스럽게 언론이 정치의 부정적이고 선정적 파르헤시아를 강조하여 보도하는 것이 당연해진 것이다. 언론은 정치인의 부정적 행동에 대해 거리낌 없는 파르헤시아로 대중들에게 진실을 전하고 대중들은 한국 정치에 대해 냉소주의적 시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대중의 알 권리를 지켜야 한다는 의견과 크게 대립된다. 언론은 파르헤시아의 역할을 수행하는 매개체로서 그 소임을 다해야 하지만 파르헤시아의 결과로 파란을 가져올 수 있는 힘을 가졌기에 어렵고 중요한 것이다.


l 미디어의 파르헤시아-영화

파르헤시아는 영화라는 매체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화라는 매체는 내용 속 감독이 전달하려는 의미를 담아 관객들에게 전달하기 때문에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자세히 보면 파르헤시아의 요소가 영화 곳곳에 숨어있다. 봉준호는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살인의 추억>의 엔딩은 범인을 잡지 못한 두식(송강호)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마더>에서는 도준 엄마(김혜자)의 알 수 없는 춤사위가 수미상관의 구조를 이룬다. <설국열차>에서는 열차의 설계자인 남궁민수는 윌 포드의 문이 아닌 열차 밖 미지의 세상을 향한 문을 열자고 한다. 이는 스크린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열차 속 억압적 사회는 자본주의의 연상시키고 권력층과 피 권력층의 균형을 추구하는 지배자의 대사와 대비되는 탈선이라는 결말을 통해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꿈꾸는 의지를 담았다. <기생충>역시 마찬가지이다.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고 마치 전경을 그림처럼 연출하거나 극명히 대비되는 미장센과 오브젝트를 사용해 캐릭터들의 사회적 계급의 대비를 극대화시킨다.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배우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거나 과한 미장센 사용은 오히려 관객들의 몰입도를 떨어트려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마치 연극에 있어 브레히트의 “거리두기”처럼 내러티브의 연속성을 의도적으로 파괴한다. 이는 관객에게 단지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닌 현실이라는 경각심을 심어주려는 의도이다. 그의 영화를 통해 관객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우리 사회의 모순성을 체감하게 된다. 이 것이 바로 파르헤시아다. 마주하기는 힘들지만 그것이 진실인 우리 사회의 단면과 민낯을 영화를 통해 구현해 낸 사람이 바로 봉준호 감독인 것이다.


l 아부와 파르헤시아

흔히들 파르헤시아를 아부의 반대로 생각한다. 아부가 입에 발린 말로 달콤한 거짓이라면 파르헤시아는 입에 쓴 진실이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아부와 파르헤시아는 모두 필요하며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소통의 방법이다. 그러나 두 방법 모두 그 “적당히”가 중요하다.

소통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선"이다. 소통은 타인과 타인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행위이다. 그렇기에 사람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한다. 아무리 가깝고 밀접한 사이라도 모든 사람들 사이에, 관계에 “적당히”의 선은 존재하고 있다. 소통에 있어 그 선 근처에 다가가지 못하면 성공적인 소통이 되기 어렵고 선을 넘어버리는 것 또한 소통을 어렵고 힘들게 만든다. 적당히란 말은 애매하다. 선은 것은 아주 개인적인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각자의 선은 다른 위치에 놓인다. 목적 없는 소통은 없기에 소통에는 설득이 숨어들어 있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선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유연한 소통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적당히의 기준치는 사람마다 다르고 결국 우리는 그 애매한 적당히의 선을 넘거나 넘지 못해 성공적인 소통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통에 있어 아부와 파르헤시아도 선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적당한 아부와 파르헤시아는 원활하고 성공적인 소통을 위해 도움이 된다. 성공적인 소통을 위해서는 아부와 파르헤시아는 상황에 따라 꼭 필요하다. 그러나 과하고 그 의도가 겉으로 드러나는 아부는 오히려 거부감을 불러올 수 있고 상황에 맞지 않는 파르헤시아 또한 소통과 이해의 의지를 꺾어버릴 수 있다. 가령 팩트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대화와 소통의 흐름에 맞지 않는 파르헤시아는 그저 눈치 없는 소리가 되어 버린다. 그렇기에 소통에 있어서 상대의 선을 유연하게 유지하는 것, 그리고 적당한 아부와 파르헤시아의 선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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