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과 손주 덕에

2026년 1월 21일 수요일

by 전귀자씨

지난해 비슷한 시기에 장인어른은 허리 수술을, 장모님은 어깨 수술을 하셨다. 평소 앙숙처럼 서로를 대하면서도 중요할 땐 천생연분인 두 분의 츤데레적 사랑을 만끽할 수 있던 시기다. 어깨 보호대를 찬 장모님과 허리 보호대를 찬 장인어른이 각자의 불편을 서로의 보조로 해결하는 모습에서 하근찬의 단편소설 수난이대를 봤다.


그러나 그 휴전과 협업의 순간에도 두 분은 입맛에서만큼은 일절 타협하지 않았다. 장모님은 얼큰하게 맵고 짠 음식을 좋아하고, 장인어른은 달달한 음식을 좋아한다. 장모님이 김치찌개를 찾을 때 장인어른은 돈가스를 찾는 식이다. 입맛에서만큼은 천생연분도 츤데레도 없다. 다 함께 배달시켜 먹을 때 장인어른과 내 아들이 먹을 피자 따로, 나머지 가족이 먹을 동태탕 따로 주문해야 평화가 유지된다.


장모님의 어깨 정기 검진 날짜에 맞춰 두 분이 우리 집에 오셨다. 모처럼 오셨으니 가볍게 술 한잔 마시기로 했다. 무슨 안주를 내놔야 모두가 만족할지 고민할 때 아들 녀석이 라면을 끓여주겠다고 나섰다. 최근 와이프 도움으로 라면 한 번 끓여본 게 재밌던 모양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도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건강을 위해 참을 순 있어도 한국인이라면 싫어할 순 없는 라면을 사랑하는 손주가 끓여준다고 하니, 두 분은 다시 수난이대 속 아비와 아들처럼 원팀이 됐다. 안주가 라면이라 주종은 소주로 결정했다. 평화로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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