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세바스티안과 모노폴리의 추억

2026년 1월 23일 금요일

by 전귀자씨

2007년 5월 군 전역하자마자 유럽 배낭여행을 준비해 6월 말 떠났다. 나보다 두 달 먼저 전역한 친구가 여행 메이트로 함께했다. 둘 다 유럽은 초행이고 영어도 잘 못해 30일 일정을 미리 빼곡하게 짰다. 즉흥을 가미하기엔 여러모로 둘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리 짜둔 일정은 첫 여행지인 프랑스 파리에서부터 틀어졌다. 파리에 3일 머무는 것으로 계획했는데, 우린 이틀 만에 흥미를 잃었다. 여행안내책자에 ‘루브르를 제대로 보려면 최소 이틀은 필요하다’고 적혀있길래 3일 중 하루를 루브르 투어로 잡았는데, 막상 가보니 온종일 그림만 구경하기엔 우린 너무 어렸고 예술에 무지했다. 모나리자 앞에서 우린 나가자는데 합의했고, 다음날 일정을 그날 오후 미리 당겨서 끝냈다. 이런 식으로 일정이 축약되고 생략되면서 전체 스케줄이 현지에서 재조정됐다.


호텔스닷컴 같은 앱이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친구는 본인보다 영어 실력이 아주 조금 괜찮아 보이는 내게 예약 변경 전화 담당을 맡겼다. 우린 미리 대사를 준비하고, 동전을 충분히 준비한 뒤 공중전화로 다음 여행지의 숙박시설에 전화해 “하루빨리 가도 될까요?”와 같은 질문을 했다. 내가 통화하는 동안 친구는 옆에서 동전을 계속 투입했다.


예약 변경에 늘 성공하는 건 아니었다. 그럴 땐 숙박을 그냥 취소하고 유레일 패스 노선도를 펼쳤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당시에는 유레일 패스를 구매하면 사용 기간 동안 횟수 제한 없이 유럽 내 어느 국가든지 기차를 타고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비어버린 하루를 채우고자 급히 기차를 타고 찾아간 도시가 스페인 산세바스티안과 이탈리아 모노폴리다. 지금도 이 친구와 만나면 배낭여행 때 최고 여행지로 꼽는 두 곳이다. 두 지역 다 해안도시인데, 친구와 난 바닷가 바위에 짐을 풀어놓고 종일 수영을 즐겼다. 정작 한국에서 철저히 사전조사하고 떠난 도시들은 생각이 잘 안 난다.


주말 이틀로 잡았던 강릉 여행을 즉흥적으로 하루 앞당겨 금요일 퇴근하자마자 출발했다. 오랜만에 강원도 가는 김에 다른 동네도 가보자 싶어 금요일 숙박은 속초에 있는 호텔로 잡았다. 밤에 도착해 밖에 나가진 못했지만 대신에 아들과 호텔 내 사우나를 즐기고 배달 앱으로 회를 주문해 와이프와 먹었다. 산세바스티안과 모노폴리의 추억이 떠오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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