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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 Nov 30. 2018

그래도 존재할 수밖에 없다면

길고양이를 만나고 알게 됐다

또 회사에서 멍청한 실수를 했다. 나는 왜 이렇게 덤벙거릴까,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나를 향해 욕을 한 무더기 퍼부으며 책상 한구석에 있는 ‘실수 일지’를 꺼냈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앞으로의 다짐 비슷한 것을 적는 실수일지. 지나간 일을 빨리 잊어버릴 생각으로 만들었지만, 한번 실수를 하면 다음 날까지 곱씹으며 괴로워했다. 완벽하지 못한 나를 엄격하게 혼내고 나면 쓸모없는 사람이 된듯한 패배감이 찾아왔다. 아픈 마음을 달래고자 친구에게 전화해 하소연했다.


너는 너 존재 자체로도 충분히 괜찮아. 친구는 말했다. 네가 잘못을 해도, 뭔가를 잘 해내도 그건 너의 존재 자체에 영향을 주지 않을 거야. 친구는 자신의 경험을 덧붙이며 말을 이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 더는 살고 싶지 않다고 기도를 한 다음 날, 길 한쪽에 핀 이름 모를 작은 보라색 꽃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저 꽃은 존재 자체로도, 무엇을 더 하지 않아도 참 아름답고 소중하다며, 우리도 그렇게 소중한 존재라고 말했다. 


친구의 따뜻한 말이 고마웠지만, 이미 삐뚤어진 마음은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꽃과 달라. 내가 회사에서 그 꽃처럼 가만히 있으면 나는 해고당할걸? 억지를 부리는 아이처럼 이상한 반발심이 들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겪은 일을 진솔하게 말하는 잔잔한 파도 같은 친구의 말이 내 마음에 넘실거렸다. 덕분에 그날은 덜 괴로워하며 실수일지를 덮을 수 있었다.


며칠 뒤 회사 근처에서 길고양이를 만난 뒤에야, 친구의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반갑게 내 다리에 몸을 비비는 알록달록한 고양이 한 마리. 다음날부터 나는 사무실을 나갈 때마다 고양이를 찾았고, 결국 8킬로짜리 사료를 사버리고 말았다. 팍팍한 회사생활에 숨을 불어넣어 줘서 고양이 이름을 ‘숨’이라고 지어줬다. 숨이를 보기만 해도 잠시 세상으로부터 해방된 기분이었다. 숨이를 보지 못하는 날에도, 사료 그릇이 비어있으면 그걸로 만족했다. 


나는 숨이에게 무엇을 기대하지 않는다. 사료를 먹었으니 밥값을 하라며 애교를 부리라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혼자 골목을 헤매며 살아야 할 숨이의 시간이 너무 힘겹지 않기를 기도한다. 차에 치여 죽지 않고 살아남은 숨이가 건강하게 존재한다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나는 아쉽게도 꽃으로 태어나거나, 고양이로 태어나지 못했다. 밥을 먹으면 밥값을 해야 하는 사람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밥만 잘 먹어도 기특하다며 엄마가 좋아했던 것 같은데, 다 커버린 내가 밥만 먹는다면 엄마는 문제가 심각하다며 병원에 가보라고 하겠지.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내 키가 커질수록, 꼭 무엇을 잘해야 될 것만 같은 압박감의 무게도 늘어났다. 결국 나는 작은 실수에도 스스로 과하게 몰아세우는 무서운 선생님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냉정한 이 세계의 법칙이 버겁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존재할 수밖에 없다. 천만 원에 0을 더 붙여 1억 원이 되어버린 어이없는 실수를 해도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 끝내주는 기획서를 작성해서 경쟁 피티에 이긴다 해도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 말하기 싫을 땐 입을 꾹 다물어도, 회사에서 잘려 백수가 돼도, 돈을 아주 많이 벌어 부자가 돼도 내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을 것이다. 존재 자체로 소중한 보라색 꽃과 숨이처럼, 하루하루를 버텨낸 내가 숨 쉬고 존재한다는 사실에 억지로 셀프 칭찬을 해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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