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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 May 28. 2020

10살 어린 사람과 친구하기, 가능?

저는 어렵습니다

드르륵 드르륵. 책상 위에 올려있던 핸드폰이 진동을 울리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화면을 보니 "가을"이라고 적혀있다. 갑자기 등장한 낯선 이름. 누굴까 생각하가가 그때 그 가을이였음을 기억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받으면 무슨 말을 해야하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만 돌리면서 핸드폰만 초조하게 바라봤다. 핸드폰 진동이 멈추고 곧 띵동 하고 메시지가 도착했다. 


쌤! 잘 지내시죠? 저 대학 붙었어요. 쌤 보고 싶어서 연락했어요!


언제더라. 기억을 가물가물 더듬어봤더니 5년전 쯤이었던 것 같다. 어떤 단체에서 진행했던 '대학생 멘토프로그램'에 한 학기동안 멘토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 나는 혁신학교 중학생의 진로를 돕는 역할을 했는데, 그때 나의 멘티였던 가을이한테 5년만에 연락이 왔다.


어어, 가을아! 먼저 연락해줘서 너무 고마워. 대학 합격 축하하고.. 엄지손으로 핸드폰 자판을 둔탁하게 누르다가, 메시지를 지워버렸다. 오랜만에 연락한 사람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머리로 생각을 정리한 후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가을이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다이어리에 적혀있는 "가을, 홍대 12시" 라는 글자를 볼때마다 마음 한켠이 무겁고 답답해졌다. 대학에 온갖 판타지가 가득한, 저 앞길 창창한 어린 아이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할까? 가을이는 어떤 조언 같은걸 기대하는거겠지? '대학생이 꼭 알아야 할 인생교훈' 같은걸 유튜브에 검색해볼까? 아니면 그날 배탈이 났다고 연락하고 약속을 취소할까?


시험날 처럼 무겁게 찾아온 약속 당일, 나는 마치 처음 소개팅에 나가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약속시간보다 일찍가서 음식을 시키고 가을이를 기다렸다. 입학 선물을 위한 작은 선물도 함께 준비했다. 가을이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오자,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척 "야, 반갑다! 키도 많이 컸네!" 라고 어설프게 말하며 우리는 대화를 시작했다. 


다행히 걱정했던 것 보다 어색하진 않았다. 가을이는 장학금을 받고 싶다고 했고, 학생회장에도 나가보고 싶다고 했다. 수강신청은 어떻게 하냐고 물어본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돈도 많이 벌고 싶다고 했다. 그날 나는 가을이와 4시간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학생활 잘하고 또 보자!" 가을이의 작은 어깨를 토닥이며 헤어졌다. 지하철을 타자마자 뒷목에 잔뜩 들어있던 힘이 스르륵 풀렸다. 철든 어른 역할을 능숙한 척 연기하느라 에너지를 너무 많이 쏟은 탓이었다. 빨리 집에 가서 포근한 이불에 누워있고만 싶었다. 


과거에 멘토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나는 자기검열을 많이 했다. 그냥 자기검열이 아니라 "감히 내 주제에, 자기검열". 당장 내 진로도 희미한데 중학생에게 진로를 코치한다는 게 말이 돼? 나의 경험으로나, 사회적인 위치로나 누군가에게 조언을 한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혹여 그 조언이 한 사람의 인생에 어떤 씨앗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조심스러웠다. 그 생각은 5년이 지나도 동일했다. 그때보다 더 어른스럽고, 더 성숙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야 될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나는 지금까지 또래들과 관계 맺기에 익숙했다. 주로 '공감'과 '동의'를 기반으로 하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특히 10살 많은 입장이기 때문에, 그 관계는 더 부담으로 다가왔다. 혹여 철없이 굴었다가는 나잇값도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까봐. 그 후 종종 가을이에게 카톡이 왔다. 하지만 그럴때마다 "그래~ 샘도 가을이 보고싶고, 나중에 한번 보자!" 라고 애둘러 대화를 종료하곤 했다.  


10살 어린 사람에게 꼭 조언과 교훈을 주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마음은 자꾸 어렵다고만 말한다. 10살이 많다는 사실을 잊고, 부담 없이 대화한다면 나는 가을이와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그냥 친한 사람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다면, 지금보다 다양하고 화려한 관계가 생겨날 수 있지 않을까. 나보다 20살 많은 사람과 영화보며 식사하는 게 자연스럽고, 나보다 6살 어린 사람과 맛집 탐방하며 같이 취미활동하는게 자연스러운. 그런 친구 관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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