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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 Jun 14. 2020

관계를 끝낼 때도 인사가 필요하다

잔인하지만 필요한 헤어짐의 인사

한국인이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 1위는 "우리 언제 밥 한번 먹어요, 우리 언제 한번 봐요."라는 말이라고 한다. 나 역시 종종 그 마법의 문장을 편리하게 사용하곤 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헤어질 때도, 인수인계를 해줬던 후임에게도. 대화의 마무리용으로 그것만큼 젠틀한 문장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기은이는 달랐다. 우리는 '시 읽기' 모임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 까만 눈동자가 빛나는 사람이었다. 친해지고 싶었다. 사건은 다음 모임 장소였던 홍대의 어느 카페에서 발생했다. 그 카페는 기은이가 평소 가보고 싶었다고 했지만, 모임 당일엔 너무 시끄러워 장소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아쉽다. 다음에 꼭 같이 가자." 나는 그때도 한국인이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을 변형하여 복제 중이었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한 말이었다. 잠시 후 예상 밖의 답변이 휙 가슴에 꽂혔다. "아니, 난 안 갈래.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아." 강한 신선함이 찌릿하고 뇌 속을 관통했다. 전 국민이 사용하는 빈말에 진심으로 반응하다니! '그래, 그러자.'라고 말하면 모두가 만족스러운 대화가 된다는 걸 기은이도 알고 있었을 텐데.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고 과감하게 표현하는 기은이가 멋있어 보였다. 


"나 이 모임 못 나올 것 같아.” 기은이는 세 번째 만남에서 또 한 번 나를 놀라게 했다. 자기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데 아직 사람들과 주기적으로 관계 맺기에는 준비가 안된 것 같다고 말을 덧붙였다. 기은이는 나와 정반대의 타입 같았다. 만약에 나라면? 요즘 일 때문에 너무 바빠서, 몸이 안 좋아서, 가족 행사가 있어서. 만나고 싶지 않은 관계는 온갖 핑계를 동원해냈다. 더 이상 만들어낼 핑곗거리도 떨어지면 결국 미적미적 약속 장소로 향했다. 마음속으론 ‘왜 나는 이 모임에 가기 싫은지’ 질문 한 보따리를 품으며. 


불편한 자리에서 억지로 웃음지은 뒤 집에 도착하면 곧바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방전된 에너지를 침대에서 충전하는 패턴을 반복했다. 물론 내 마음은 다른 사람들도 다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많은 관계들이 스르륵 희미하게 사라졌다. 계속되는 핑곗거리 끝에, 불편한 억지웃음 끝에. 


기은이가 자꾸 이런저런 이유로 모임을 나오지 않고 피했다면 더 상처 받았을 것이다. 오히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웠다. 관계를 시작할 때 자기소개와 인사말로 예의 있게 시작하는 것처럼, 관계를 끝맺을 때도 잔인하지만 헤어짐의 인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기은이를 통해 배웠다. 그래야 내가 진짜 원하는 인간관계에 나의 에너지를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관계를 맺을 때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 타인을 위한 올바른 태도임을 배웠다.


기은이와 관계가 끝난 후, 나도 다른 관계에서 헤어짐의 인사를 시도해보았다. 몇 년 간 자주 만났던 J에게 어느 순간 섭섭함을 느끼고 있었던 참이었다. 일방적으로 나만 연락을 하고, 나만 약속을 잡고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관계가 끝날 것이 예감이 될 때. 그 날은 작정하고 J에게 솔직하게 속마음을 털어놨다. 불편하면 앞으로 먼저 연락하지 않을게. 나중에 J의 마음이 편해지면 그때 먼저 연락해. 


J도 아마 나와 같은 유형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만나면 불편하지만 솔직하게 말하기 미안해서 어기적 어기적 관계를 지속해온 사람. J와의 관계가 다시 시작될 수 있을지, 정말 인연이 끝난 것인지 아직까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처음으로 내가 관계의 끝을 용기 내어 정리했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려고 한다. 관계를 맺을 땐 진심을 다하기. 관계를 끝내고 싶을 땐 솔직하게 표현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기. 앞으로 나의 인간관계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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