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꽃을 팔아서 때부자가 된 경험이 있다. 시간은 99년 XX초등학교 2학년 8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은 벼룩시장하는 날인 거 모두 알죠? 물건을 팔 사람은, 물건을 팔고 구매할 사람은 구매를 하면 됩니다." 선생님이 교탁에서 말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어? 나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는데.. 뭔가 준비 해온 친구들은 책상 위에 물건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나는 물건을 소비하는 사람보다, 뭔가를 만들어서 파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미술시간에 썼다가 남은 흰색 한지에 분홍색 사인펜을 칠한 후 장미꽃을 만들었다. 초록색 사인펜도 칠해서 줄기와 이파리를 만들었다. 완성하니 그럭저럭 이쁜 것 같았다.
책상 위에 장미꽃을 올려놓자 금세 팔렸다. 수제 한지 장미꽃은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친구들은 자기 것도 만들어달라며 책상 위에 돈을 놓고 갔다. 정신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책상 위에는 점점 돈이 쌓여가고, 나는 한지에 색칠하기 바빴다. 벼룩시장이 끝나자 기운이 빠졌지만, 책상 위에 쌓인 종이 화폐를 보니 마음이 뿌듯했다. 내가 만든 장미꽃을 친구들이 이렇게 많이 좋아해 주다니!
시간은 흘러, 2021년. 직장인이 된 나는 벼룩시장에서 받은 돈보다 몇 배는 큰돈을 다루는 일을 하게 되었다. 전체 광고 예산을 각 매체에 분배하는 일이었다. 이번 달에 유튜브에는 1억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예상 조회수는 얼마가 나올까. 숫자가 빼곡한 모니터를 쳐다보니 눈알이 빠질 것 같이 아팠다. 몇 번을 해봐도 참 더럽게 재미없는 일이었다.
왜 이렇게 일이 하기 싫지? 아무래도 처음 기획부터 참여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았다. 왜 이런 컨셉으로 광고를 만들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은 채, 나는 뒷단에서 갑자기 매체 운영을 떠맡게 되었다. 물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매체 운영을 많이 해봤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과정은 생략한 채 갑자기 찾아와 ‘매체 운영’ 만을 요구하는 그 광고가 낯설었다.
이전 회사에서는 달랐다. A브랜드에는 온 애정과 열정을 다 주었다. 처음 기획부터, 경쟁사 분석, 시장 조사, 촬영, 녹음실, 편집실, 매체 운영까지. 내가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거실 TV에서 익숙한 내레이션이 들리면 곧바로 뛰어가 내가 맡은 광고를 모니터 했다. 이미 수십 번 모니터 했지만, 그래도 계속 계속 보고 싶었다. 광고 매체를 운영하는 일은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운영하고 싶었다. 내가 맡은 나의 브랜드니까!
2021년의 속세에 쩌든 내가 XX초등학교 2학년 8반으로 되돌아가는 상상을 한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에게
더 쉽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짝꿍을 꼬셔서 같이 수제 장미를 만들자고 하면 돼. 짝꿍한테는 한지에 초록색으로 계속 색칠하라고 시켜. 그리고 다른 친구를 또 꼬셔. 그 친구한테는 분홍색으로만 계속 색칠하라고 시켜. 친구들이 한지에 색칠해 오면 너는 장미꽃을 만들고 줄기를 붙이면 돼. 그러면 넌 더 많은 장미꽃을 만들 수 있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어! 벌어 든 돈의 20%를 친구들에게 배분하면 진짜 끝!
물론 나는 돈을 더 많이 벌어서 좋지만, 하루 종일 한지에 초록색으로 색칠한 친구에게도 기분 좋은 일일까? 그 친구가 그 일을 1년 내내 반복하게 된다면 어떨까? 아마 끔찍할 것 같다. 결국 2021년의 나는 하루 종일 한지에 초록색으로 색칠하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왜 초록색으로 색칠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컨베니어 벨트 위에서 가만히 일하는 사람. 그러나 이 방법이 슬프게도 매우 효율적이란 것은 알고 있다. 그래도 난 커다란 기계에 매일 돌아가는 하나의 부품이 되고 싶진 않다. 정말 그러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