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이상의 갈등
내 속엔 두 개의 자아가 산다. 마케팅, 광고, 트렌드에 민감한 ‘밥벌이 중시형’과 소설, 시, 글쓰기, 사랑, 사유에 반응하는 ‘예술가 지향형’. 밥벌이 중시형은 배달의 민족 CBO가 쓴 책을 보고 밑줄을 긋는다.
마케터가 아이돌을 모른다는 건 자랑이 아닙니다.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죠. 모르는 건 별개예요. 아이돌 음악이 취향이 아니라도 요새 유행한다는 곡들은 한 번씩 들어두고, 유튜브에서 방탄소년단 영상도 찾아보며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 공감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가 취향이 아니더라도 소비자들이 많이 본 영화라면 같이 봐 두고, 천만 관객이 본 영화도 다 봅니다. (마케터의 일, 31P)
예술가 지향형은 정희진 작가의 책을 보고 밑줄을 긋는다.
나는 '베스트셀러'를 읽지도 않고 사지도 않는데, 잘 팔리는 책에 돈을 보태고 싶지 않은 '쪼잔한 정의감'이 가장 큰 이유이고, 대게는 별다른 자극이 없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는 특성상 지적 자극을 주기 어렵다. 통념과 달리 대중은 균질적인 존재가 아니다. 대중은 한 덩어리가 아니다. 대중이라는 말 자체가 근대에 탄생한 신생 용어다. 그러므로 공통분모가 없는, 각자 다른 상황에 놓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려면 책 내용이 절충적이거나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정희진처럼 읽기, 20P)
현실과 이상의 갈등. 이것은 내 마음 한쪽에 처박혀 있는 오래된 화두다. 마케터는 보기 싫은 영화도 트렌드 파악을 위해 억지로 봐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남자들만 우수수 나와서 싸움질하는 알탕 영화, 억지 눈물을 강요하는 CJ 감성 영화는 쳐다보기도 싫다. 예술가형의 미세한 승리.
물론 밥벌이 중시형이 승리할 때도 있다. 지금 우리는 모든 영역에 걸쳐 ‘소비자’가 되어 버렸다(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김예슬)는 자본주의를 향한 비판적 시선에 동의하지만, 사람들이 더 소비하도록 만드는 일로 고민하는 내가 있다. 이렇게 밥벌이 중시형과 예술가 지향형은 서로 충돌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력을 다투고 있다.
그러던 와중에 아이유가 이제 더 이상 그녀의 노래 '마시멜로우'를 부르지 않겠다고 한 기사를 보았다. 그녀의 나이, 26살에 마시멜로우의 귀여움이 더 이상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아적인 안무와 말랑거리는 가사로 삼촌 팬들의 판타지를 채워야 했던 과거의 한 부분을 이제 완전히 털어내겠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흥미로워 포털사이트에 아이유를 검색했다가 그녀의 9년 전 과거 인터뷰를 보았다. 어울리지 않는 음악(마시멜로우 같은)을 대세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다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아이유가 대답한다.
"뭘 하고 싶은지만 잊어버리지 않으면 된다"고 주위에서 많이 들었어요. 전 그게 굉장히 복잡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그래도 앞으로 차근차근 준비해서 제가 마시멜로우 같은 음악만 할 줄 아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드리면 된다고 생각해요"(대학내일, 2010)
먹고사는 문제는 중요하다. 그녀는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잠깐 자신을 잃어버리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이후에 다시 자신을 되찾았다. 마시멜로우를 더 이상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녀처럼 영리한 전략으로 삶과 자아의 균형을 찾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나는 삶을 치밀하게 계획하는 똑 부러지는 사람이 아니다. 흥청망청 흘러가는 대로 놔두는 ‘될 대로 돼라’ 타입. 현실과 이상 중 꼭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옵션이 나에겐 가혹하다. 왜 천만 관객이 다 본 영화는 내 취향이 아닐까? 왜 밥벌이 중시형과 예술가 지향형은 합쳐질 수 없을까?
삶과 예술, 또는 현실과 이상, 또는 밥그릇과 꿈.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냉혹한 현실에 울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마음이 끌린다. 자아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이상을 실천하는 사람들. 듣는 사람이 없어도 자신의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인디 밴드가, 대중들이 관심 없어하는 주제로 영화로 만드는 독립 영화감독이, 남들은 다 잊어버린 이야기를 오랫동안 슬퍼하며 추모하는 어떤 시인이. 영리한 전략가가 되지 못하는 나의 두 개의 자아는 오늘도 이리저리 갈등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