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니 놀기 대마왕

내 색칠북은 어디로?

by 오아시스

"아들, 운동화를 사 줄까? 크록스를 사 줄까?"

"당연히 크록스지. 난 운동화는 불편해."

겨울이 곧 다가오는데도 아들은 맨발에 크록스를 제일 편해 한다. 그런데 이제는 크록스도 작아서 학교 실내화를 신발처럼 신고 다닌다.

"엄마, 근데 내가 요새 상어에 푹 빠졌거든. 상어 크록스 사 주면 안 돼?"

"상어 크록스가 있을까?"

"있어. 내가 봤거든. 잠깐만 내가 찾아볼게."

아들은 내 폰을 들더니 금세 검색을 해서 상어 크록스를 내 앞에 들이민다.


내 어릴 적을 생각해 보면 동네 애들하고 놀던 기억밖에 없다. 앞집 아저씨가 내게 “넌 여자애가 맨날 남자들하고 어울려서 선머슴처럼 놀기만 하고 ….” 이런 말을 남기셨다. 쯧쯧쯧, 하시는 혀차는 소리도 꼭 들려주셨다. 친절하시게도 말이다.


집에는 책가방만 던져 놓고 골목길로 나가면 누구든 있기 마련, 놀다보면 한녀석, 두녀석이 합류하고 나중에는 10명 정도의 넘는 아이들이 모여 우리는 가지가지 놀이를 했다. 나이먹기, 술래잡기, 십자가, 가위강, 재기차기, 자치기 등. 남동생이 나를 어둑해질 무렵 찾으러도 다녔다.


9시가 다 되어가도록 학교 운동장에서 끝까지 남아서 놀던 한창 때도 있었다. 담임 선생님도 학교 끝나고 운동장에서 놀지 말고 집으로 곧장 갈 것! 이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선생님이 안 보이는 구석진 곳에서 고무줄을 신나게 하다가 5시에 '국기에 대해 경례' 시간이 지나 선생님들이 퇴근하면 운동장 한 가운데로 무대를 옮기고 붉은 노을을 보며 마저 놀았다. 계절이 상관없었다. 봄이든 여름이든 가을이든 겨울이든 난 놀기만 했다.


난 놀기에 자질이 있었다. 고무줄 여왕, 공기 여왕, 묵찌빠 대마왕, 달리기, 힘으로 하는 십자가, 나이 먹기, 재기차기 등등 했다하면 난 어느새 요령을 빨리 체득해서 1인자의 자리에 등극했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때는 난 몸으로 노는 놀이로만 놀았구나. 앉아서 실뜨기나 뭐 만들기, 공예, 종이접기 이런 일들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하지 않았으리라. 따분해서.


지금 생각해 보면 영 상상이 안 가는 나의 모습 같다. 지금은 움직이라고 해도 꿈쩍도 안 하는 대마왕인데 어릴 때는 몸을 가지고 주체를 못 해서 밖으로만 밖으로만 나가 놀다가 에너지를 다 빼고 집에 돌아왔었구나. 그리고도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만 잘 들었을 뿐인데 공부도 잘 했다. 문제집도 비싸다고 사지 않았는데 선생님 말씀만 들으면 이해가 되고 문제가 풀어져서 초등학교 내내 거의 올 '수' 였을 거다. 시골이니 그랬을 수도. 뭐... 그래서 진이 빠지도록 놀아도 잔소리는 덜 들었던 것 같다.


그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초등 학교 다니기 전 내가 가장 아끼던 건 종이인형이었다. 10원, 20원 했던 거 같다. 종이 한판을 사면 벌거벗은 이쁜 여자애 몸과 여러 가지 옷들, 장신구들, 신발이 세트로 있어서 한 장을 사서 오리면 목 부분에 걸치는 종이부분을 이용해 여자애를 이리저리 꾸밀 수 있는 장난감이었다. 의외로 난 또 종이인형에 빠졌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많이 샀던 건 아니다. 난 이쁜 것들을 참 잘도 골라서 샀다. 동네 여자 아이들이 나를 부러워했다. 내가 갖고 있는 인형이 제일 이쁘다면서. 난 색칠북 사이사이에 종인인형 세트들을 잘 끼워두었다가 틈만 나면 펼쳐서 이 옷을 입혀 보고 저 옷을 입혀 보고 금발머리를 씌웠다가 다른색 머리 가발도 코디해 보며 혼자서 시간을 보내며 놀곤 했었다. 종이 인형은 상대가 없이 혼자 놀아도 너무나 좋은 장난감이었다. 내 이쁜 종이인형들을 다른 아이 손에 빌려주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던 어느날, 색칠북 자체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통째로, 완전히, 늘 놀았던 거라 늘 가까이 있었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때의 충격이 지금도 살짝 남아있다. 누가 가져간걸까, 난 누군가가 가져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탐내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거기다 내가 만지지도 못 하게 하고 빌려주지도 않았으니까 내가 얼마나 얄미웠을까. 보석처럼 애지중지 나만 겨우 조심조심 닳아질까 살살 만지며 흐뭇해 했으니까. 그런 내 모습이 싫었나. 그때도 범인을 못 찾았고 지금까지도 왜 없어졌는지 이유를 알지 못 한다.


상어 크록스를 신고 신나게 뛰어놀 아들의 얼굴이 상상이 간다. 45점을 맞아도, 100점을 못 맞으면 어떠랴. 나도 신나게 뛰어놀 때가 제일 행복했듯이 아들도 상어 크록스를 신고 가장 행복한 놀기 대마왕이 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