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시간

땡처리 시계를 사다

by 오아시스

"이 시계 뭐야? 샀어?"

막내가 내 손목에서 번쩍이는 걸 신기해했다. 막내 아들은 9살. 아마도 내가 시계를 찬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더 놀라워 했을 것이다.

"응, 엄마 시계 샀어. 이쁘지?"

"백만원이야? 이백만원이야?"

돈 관념이 없는 아들은 무턱대고 부르는 건 백만원 단위, 아니면 천만원 단위다.

"이거 좋은 시계야. 그런데 90% 땡처리 해서 15000원에 샀어."

"시계 괜찮네. 엄마는 꼭 세일할 때나 땡처리 할 때 쇼핑하더라."

둘째딸이 갑자기 내 시계를 들여다 보며 (남동생과 고작 한살 차이가 나지만 정신적인 수준은 한 5년쯤 훌쩍 뛰어 넘는다.) 한 살 차이의 위력을 과시했다.

"엄마가 돈 많이 벌어서 너희가 대학교 들어갈 때는 천만원짜리, 이천만원짜리 시계를 사 줄게. 기대해!"

"진짜?"

"그럼! 시간처럼 소중한게 없으니까."



내 인생의 시계라고나 할까, 기억에 남아 있는 시계는 두개.

한 시계는 중학교 때 받아본 목걸이형 시계, 손목에 차는 시계가 아니라 목에다 걸어서 시간을 보고 싶을 때면 동그란 커버를 딱하고 열어 내 얼굴도 보이는 윗면의 거울, 아랫면에 있는 시간을 확인하는 시계였다. 특이해서인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그것도 잠시, 거추장스러운 걸 싫어하는 내가 목에 달랑거리는 시계를 지속적으로 차고 다녔을 리는 없다. 길게 잡아 일주일쯤. 그리고 행방도 없이 사라졌다.


대학교를 졸업하는 날, 졸업 전에 난 이미 출판사에 취직을 해서 두달 정도 일을 했던 상태라 출판사 사장님이 졸업 선물이라며 백화점에서 (이태리 제품이었던 거 같다.) 시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내 맘에 쏙 드는 시계였다. 시계 안의 숫자는 꽃밭처럼 꾸며져 있고 초침은 꽃 위를 날아다니는 나비였다. 사장님은 시계의 의미를 알고 계셨나보다. 연세가 있으셨으니. 물론 인간적인 면으로는 도드라지는 문제들로 외로운 사람이었지만 돈은 많았다. 심지어 전직 대통령의 친척이기도 했다. 얼굴도 닮았다. 그런데 사람 괴롭히는 취미가 아주 수준급이었다. 이런 말보다는 졸업 선물로 받은 시계로 기억해야지. 아까워서 그 시계는 버리지 못 하고 간직하고 있는데 다시 시계방에 가서 약을 넣고 차고 다녀볼까. 나비처럼 꽃밭을 날아다니며 거니는 느낌으로 시간을 보내볼까.


그리고 내 돈을 주고 처음으로 산 내 시계. (비록 땡처리지만)

이 말은 곧 내가 처음으로 내 시계를 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말.

왜? 굳이 지금에서야?

내가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45년을 살고서야 내게 주어진 태초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고 하면 이상하려나.


작년 겨울부터 모닝 페이지를 쓰기 시작했고 아티스트 웨이 책을 4,5번 읽어가고 있고 스승님과 생각의 지도로 이야기를 나누고 독서회 언니들과 꾸준히 만나서 교제를 하고 도서관에서 주는 수업이 다 처음 해 보는 거라 부담스러웠지만 예스!하고 스트레스 받으면서도 다 해냈더니, A가 X에게 라는 책이 쾅쾅쾅 두드려대고 한밤의 아이들까지 읽어 내자 내 태초의 시간 문은 기다렸다는 듯이 펑! 하고 열렸다. 이 모든 게 고루고루 힘을 보탠 까닭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내가 태초의 시간이라고까지 거창하게 말하는 이유는 창조주가 창조한 모습 그대로의 나, 태초의 나를 찾아서 비로소야 내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존재가 맛 봐야 하는 시간, 내 존재가 누려야 하는 시간, 내 존재로 스며드는 자연스러운 시간. 시간의 결이 달라지는. 창조주가 나를 위해 세팅해 놓은 시간.


그런데 결국은 이 모든 마음이 이쁜 시계를 갖고 싶다는 물질적 욕망으로 모아지려고 했다. 시계에 관심이 1도 없었던 내가 기념으로 내 마음에 쏙 드는 시계를 갖고 싶었다. 부자들은 천만원, 이천만원짜리 시계를 선물하기도 하고 차고 다니기도 한다고 들었을 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나도 꼭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백화점에 가서 내 맘에 쏙 드는 시계를 천만원이든, 이천만원짜리든 턱 하고 사서 내 손목에 툭 차고 태초의 시간을 누비며 살고 싶다!


시계가 갖고 싶다. 오우 이런!

집에 시계가 남아 뒹굴 때가 있었는데, 비싼 시계도 허드레로 굴렸는데, 이제야 아쉽다. 비싼 시계들도 많이 버려버렸는데. 내 맘에 드는 시계, 난 시계를 살 거야. 태초의 시계를!


그러자 앱에서 시계를 땡처리 한다는 문자가 바르르 왔다. 난 바로 들어가 천만원짜리 대신 알도 커서 시간도 잘 보이고 옆에 붙은 껌딱지가 하나라 밥 주기도 편한 고전스런 시계를 만오천원에 주문했다. 그리고 받아서 손목에 찼다. 내 마음에 쏙 든다. 태초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