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 존 버거

시적인 내 몸짓을 찾기 위해

by 오아시스

이 작품을 뭐라고 쓰는 일 자체가 '감히'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지만 어쩔 수 없군요. 이해는 못 해도 놀라운 감흥을 담아 정리해 봐야 할 것 같아요.


1. 사적인 삶과 역사

주인공 G는 1886년에 태어나 1915년에 죽는 시간 위에 존재하고 있어요. 그 시기의 연표만 들어도 얼마나 세계가 혼란스러울 때인지 짐작이 가능합니다. 산업혁명과 함께 인류의 문명에 혁명이 일어났다고 해야 할까요? 유럽은 전쟁의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네요. G는 지극히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사적으로 지내는데 의도치 않게 G는 역사의 여러 현장들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1898년 5월 6일은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이탈리아 역사의 한시기가 끝나는 해입니다. 그런데 G는 그날 호텔밖으로 우연히 나갔다가 피렐리 공장의 노동자들이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도시로 진군하는 폭도들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섞이게 되며 역사적인 현장에서 죽음을 보게 됩니다. 희망없는 폭동은 이탈리아의 각지역으로 번져가지요.

1910년 9월이예요. 밀라노의 항공 클럽에서는 비행기를 타고 알프스 산맥을 넘는 최초의 비행사에게 삼천 파운드를 주겠다고 내거는 사건이 벌어져요. 24살의 출신 비행사 차베스는 이 산맥을 최초로 넘기 위해 좋은 날씨를 벼르고 있어요. 이곳은 한니발과 나폴레옹이 각각의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간 역사적인 지점이기도 해요. 군중은 역사적인 현장에 동참하기 위해 이 작은 마을에 모이고 뉴스를 날려보내요.

하지만 G는 차베스의 친구이고 단둘이 비행도 한 사이지만 이 역사적인 사건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약혼자가 있는 웨이트리스에게 사랑을 고백하느라 사적인 경험에 빠져 있어요.

우리는 역사의 새 장을 여는 최초의 선구자들일세. 이 일이 하루 만에 사랑에 빠져 버린 일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친구인 웨이만은 말하죠.

오십만명이 넘는 이탈리아인들이 일자리를 찾기 위해 혹은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국으로 떠났다고 하는 해이기도 해요.

1920년이예요. 트리에스터가 이탈리아에 병합되자 파시스트 지배층은 공공장소에서 슬로베니아어를 쓰는 걸 금지해요. 이탈리아가 공공연히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날리기도 하는 뒤숭숭한 시절이죠. 슬로베니아어를 쓰는 여인 누샤에게 자신의 여권을 주기 위해 그녀의 집에 갔다가 본의 아니게 산 조반니 광장에서 벌어지는 폭도들 한가운데에 휩싸여요. G는 결국 오스트리아 정보원이 아니라, 슬라브인들의 폭동을 조직하기 위해 고용된 사람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이탈리아 측 첩보원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지요.

여성편력으로 지극히 개인적인 행보를 이어갔던 G의 인생은 역사적인 사건없이는 설명할 수가 없는 아이러니가 있네요.

"군중은 그들을 둘러싼 도시를 다른 시선으로 본다. 그들은 공장 가동을 멈추고, 상점 문을 닫게 했으며, 교통을 마비시키고, 거리를 점령한다. 도시를 세우고 유지시킨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무언가 만들 수 있음을 알아가고 있다...그들은 그 동안 자신들으 의지와 상관없이 습관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있다. 다시 한번, 그들은 혼자서는 던져볼 수 없었던 질문을 함께 던지고 있다. 왜 나는 내 삶을 죽지 않을 만큼만 남겨 놓은 채 조금씩 조금씩 떼어서 팔아야 할 운명이란 말인가?"
"바리케이드에서는 두려움도 끝나고 변화가 완료되었다. 변화는 군인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지붕 위 남자의 외침으로 완성되었다. 갑자기 아무것도 후회할 것은 없다. 그들이 친 바리케이드는 평생 동안 그들에게 가해졌던 폭력과 그들을 지켜 주던 것들 사이에 세워진 것이었다. 지금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것은 그 동안 그들이 살아온 과거의 정수이기 때문에 후회할 것은 없다. 바리케이드 이쪽은 이미 미래다. 소수의 지배층은 착취당하는 피지배층에게 끊임없이 현재만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시간 감각을 무력화시키고, 가능하면 말살시킬 필요가 있다. 국가를 유지하는 데 '투옥'이 효과를 가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바리케이드는 그런 현재를 깨 버린다."

2. 연극

연극을 현실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들이 존재해요. 사촌 조슬린은 연극이 진정한 삶이며 나머지 삶은 연극과 연극 사이의 텅빈 막간에 불과하다고 믿지요. 말을 탄다는 행위 자체는 주인, 기사만이 할 수 있어요. 그것은 고귀한 신분을 나타내는 행위지요. 사냥개를 잘 다루는 것도 용감함의 표시지요. 능력이 있고 말을 타고 달려가는 속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죠. 조슬린에게 말과 사냥은 그런 연극같은 삶을 현실인것처럼 믿게 해 주는 소품이지요.

권력을 가진 남자라는 역할, 상류층의 역할, 페이비언 사회주의자의 역할, 부르주아의 역할,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역할, 웨이트리스의 역할, 이모의 역할, 남편의 역할, 갖가지 역할이 주어지고 모두들 연극 배우처럼 그 역할에 충실히 살아가고 있어요.

삶이 연극이예요. 그래서일까요? G가 유부녀들과 사랑을 나눌 때는 '복수'라는 단어를 사용해요. 누구에게, 무엇을 향한 복수일까요? 사회적인 세계에서의 G는 난봉꾼이고 돈 후안일 따름인데 말이죠. G는 부인을 통제하는 데 사랑을 느끼는 남편,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데 부인을 다방면으로 활용하는 남편을 향해, G자신이 어떠할 거라고 예상하는 카모마일을 향해 '복수'라는 단어를 사용하지요.

G는 물어요. "당신들의 삶은 어디에 있습니까? 손가락 끝에? 심장에? 꿈의 맨 밑 바닥에? 양쪽 어깨 사이에?" G가 보기에 그들은 살결과 옷 사이의 그 어두운 틈 안에서만 살고 있어요. 그들의 존재 자체가 G에겐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고 생각하지요.

연극같은 삶이라, 2021년 대한민국에서 45세의 여성인 내 삶은 어떨까요? 연극일까요? 진짜 내 삶일까요? 45세의 이전의 삶은 연극이었던 거 같네요. 누군가의 아이로 누군가의 아내로 사회에서 부여한 적당한 이미지를 낚아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살았으니까요. 이래야 한다는 누구나 다 아는 스토리일뿐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은 아니었으니까요.

원하지 않아도 삶은 만들어져요. 세상 덕분이죠. 끝없이 이미지를 만들어 내니까요. 잡지 한권만 읽어도 그럴듯한 이미지 몇 개를 골라잡을 수 있어요. 더 쉬운 방법은 물건 몇 개를 구입해서 내 몸에 착용만 해도 그 이미지를 가질 수도 있다는 점이예요. 연극이 현실이 되게하는 소품들은 세상천지 한가득이예요. 잘 고르기만 해도 적당한 배역을 고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현실처럼 느껴지는 매트릭스 안에서 적당히 속아 살면 적당한 삶이 되는 거예요. 삶이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될까요? 그래서 G는 연극을 향해 '복수'라는 단어를 썼을까요?

"우리 안에는 대수술을 할 수 있는 예리함과 날카로움이 있다. 우리 안에 용기만 있다면 세계를 있는 그대로 가를 칼날이 있다. 우리의 일부인 척 하는 세계, 무기력한 표현에 따르면 우리가 속해 있다고 하는 바로 그 세계를."

3. 총체성

여성은 그녀 안에 그녀를 관찰하는 이가 있고 (외부의 남자 또는 다른 이들이, 그녀를 주시하는 눈길) 관찰당하는 눈길. 두 개의 시선을 늘 갖고 있다고 해요. 사랑에 빠진 여성의 존재감은 몸짓 하나하나가 시가 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적어도 그 순간만큼 그녀는 오직 하나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예요. 안의 관찰하는 이와 관찰당하는 이의 시선이 멈추어버리기 때문이죠. 흔치 않은 순간이죠. 오직 그런 순간에만 여성은 총체성을 느낄 수 있다고 해요.

여성은 늘 자신 안에 '어때야 한다'는 두개의 시선을 갖고 있는 셈이네요. 그래서 어떤 여성이든 항상 - 정말 혼자 있을 때를 제외하고 - 스스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달고 다녀야 하는군요. 그래서인가봐요. 여성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경험 안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을 때에만 그녀 자신의 삶과 경험도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고 믿고 있어요. 슬프네요. 살아가기 위해서 여성은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다니요. 여성 자신만의 삶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책의 여주인공들은 섹스의 순간에 시선의 옷을 벗고 '나'로 돌아갈 수 있었어요. 이름없는 '나'가 이름없는 '너'를 만나 충만함을 느끼게 되는 시간이예요. 낭만적인 섹스네요. 그래서일까요? 이 순간만큼은 여성도 자유롭겠죠?

카미유라는 여성이 있어요. G는 그녀를 카모마일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러요. 그저 한 음절의 차이일 뿐인데 카모마일이라고 부르자 그녀는 삶으로부터 뛰쳐나와 '그녀 자신'이 되는 자유로움을 느껴요. 아주 작은 세부나 흔적까지도 그녀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는 절대적인 느낌을 받아요. 이 세상에 그녀를 위한 공간은 오직 그녀의 몸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해 주지요. 세상은 그녀에게 여러 시선의 독방들을 줄줄이 마련해 놓고 있었는데 말이죠. 그녀는 오로지 그녀 자신으로 가득하게 만들어 준 G에게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어주지요. 자연스러운 귀결이네요. 생각해 보니.

G가 돈 후안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네요. 여성들은 주변 사람들의 압력이나 기대에 따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변모시키는데 불쑥 들어와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남자. 감추고 숨기고 계산할 것 없이 자신의 벗은 모습을 보여주며, "당신도 벗으세요, 당신이 갇혀 있는 두 개의 시선으로부터 나오세요. 당신은 당신이지 그 어떤 대상이 아니예요. 당신의 존재만으로 너무나 눈이 부십니다." 라고 말 해 주는 특별한 남자가 되어버리거든요.

대상으로서의 나가 아니라 '나' 자체로 열망이 되어버리는 매혹을 느낀다는데 어떻게 몸을 주지 않겠어요? 그런 특별한 순간은 한번 뿐이라는 걸 여성들은 직감적으로 알아채거든요. 총체성을 느끼게 해 주는 사랑의 순간. 내 몸짓 하나하나가 시가 되어 버리는 순간. 사랑은 참 짧군요. 사랑을 잡아두려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정말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네요. 한 시선 안에 영원히 갇혀버릴 수도 있어요. 남편이라는 정원에서 바람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나무처럼 살아야 할 지도 모르겠네요.

내 총체성을 내가 창조하며 살 수는 없을까요? 시선을 멈추어버리기! 내가 나에 대한 이미지를 의식하지 않고 남들의, 남자들의 시선을 차단하고 멈추어 버리기! 지금 2021년에는 가능한 이야기라 다행스럽네요. 내 마음을 들여다보며 내 마음에 말을 건네며 지내면 시선 멈추기가 가능할 거 같아요. 총체성을 느끼는 당신은 곧 언제나 시가 될 수 있어요!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그녀의 무게가 얼마쯤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그녀와 중력 사이에 자신의 손을 두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들여다봤다. 완전히 그녀에게만 집중하고 있는 눈...그녀는 그가 자신의 몸을 구석구석 건드릴 때마다 몸무게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가 들어 올릴 때마다 조금씩 그녀의 무게가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이제 그녀도 팔을 들어 그를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