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이슈메일, 너도 저런 운명을 당할 수 있어. 하지만 어떻게든 나는 다시 쾌활해졌다. 이건 어서 배를 타라는 유쾌한 권유, 출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이다. 그래, 내가 탄 보트에 구멍이 뚫리면 나는 불멸의 존재로 출세하는 셈이지. 그래, 고래잡이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야. 아차! 하는 순간에 인간을 영원의 세계로 처넣고 마니까. 하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우리는 이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를 매우 잘못 생각해온 것 같아. … 하지만 제우스라 할지라도 내 영혼에 구멍을 뚫을 수는 없으리라.
이런 기개가 도대체 어디로 다 사라진걸까요? 태어날 때 있기는 있었던 모양인데 깡그리 사그라져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아요.
자신을 언약의 축복된 자손 이삭이 아니라 이슈마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용기부터가 제게 심상치 않게 다가왔어요. 문학 작품 가운데 아마도 가장 유명하다는 첫 구절,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라고 주인공은 선언부터 하고 봐요. 이슈마엘이 누구인가요? 신께 선택받지 못 해서 영원히 저주 받을 운명의 대명사인데(기독교적인 입장에서는) 감히 이슈메일의 운명까지도 받아들이겠다고 하네요.
그런 운명이 어떨지를 상상해 봤어요. 무엇이든 어긋나기만 하는 인생? 무엇이든 불온함에 빠지기만 하는 인생? 해도 해도 안 되는 인생? 험난한 인생길 굽이굽이마다 역대급 불운을 갖고 있는 인생? 선량함으로 대하지만 절대악으로 당하고 마는 인생? 안락한 집 하나 없이 정처없이 헤매기만 하는 인생? 등등등. 그런 인생 안에 있다가는 무게에 짓눌려 숨도 쉴 수 없을 터예요. 그런데 주인공은 자신의 운명을 벗어나 밖에 서 있어요. 험악한 산봉우리에서 올라선 사람이 작아진 밑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처럼 인생 윗자리에 서서 외투자락을 펄럭이며 폭풍우 같은 자신의 시간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있지요.
기개가 참 다르네요. 사소한 일 하나에도 상처받지 말라며 대일밴드같은 문장들이 하늘의 구름처럼 떠다니는 시대인데 저주받은 인생 자체를 자신의 인생으로 옴팍 끌어안는 위대한 영혼을 만난 거 같아요. 저와 이슈마엘의 간극은 170년.
심지어 제우스마저도 자신의 영혼은 뚫을 수 없으리라 말해요.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는 영혼을 말하는 걸까요. 책을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삶과 죽음도 넘어서는 영혼을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아요. 어제 봤던 영화 ‘항거’가 떠올랐어요. 1919년 열여덟살 먹은 소녀는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사건들을 겪으면서도 ‘자유’에 대한 영혼을 꺾지 않아요. 그러자 돈에 영혼을 판 친일 경찰이 묻지요. "네가 그토록 바라는 ‘자유’가 뭐냐?" 유관순은 망설이지 않고 “자유란 하나뿐인 목숨을 내가 바라는 것에 마음껏 쓰는 것”이라 답하지요. 그 대사를 들을 때에도 가슴에 ‘쿵’하는 울림이 왔어요. 그 상황에서 그런 기개의 대사라니요.
나와 100년쯤의 간극이 있는 유관순과 이슈마엘이 겹쳐져 보여요. 둘은 결국 생과 사를 넘어 ‘자유’를 추구하는 캐릭터들이었을까요. 바늘끝같은 죽음의 경지에서 누리는 자유가 무엇인지를 아는 두 사람. 누구도 유관순처럼 살라면 살까요? 후대에 존경은 받지만 당사자로 살 수 있을까요? 그런 용기가 있을까요? 그런데 유관순의 영혼은 다시 그리 살겠다고 손을 번쩍 들것만 같아요. 고통스러운 것, 망하는 것, 가난해지는 것, 절망에 빠지는 것, 배신당하는 것, 숨 쉬는 것마저 위협에 맞서야 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까지도 껴안으며 삶으로 받아들이며 시간 레일 위로 달려가는 자유의 인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