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전체에 백색 실명증이 급속히 퍼지기 시작해요. 사람들은 이유없이 시력을 잃고 우유같은 하얀 세상 속에 놓이게 되요. 기존의 실명이 흑암처럼 캄캄한 세상 속을 휘저어야 했다면 이 실명은 온통 흰색 뿐인 세상이 눈부셔서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나 흑암이나 밝음이나 안 보이는 건 마찬가지예요. 그들은 오래된 정신병원을 수용소 삼아 갇히기 시작해요. 여기저기서 실명이란 전염병을 일으킬 위험한 사람들이 끌려오기 시작하죠.
얼마 안 있어 수용소는 터지기 일보 직전이예요. 수용소를 지키고 있는 군인들도 그들과 마주치는 것만으로 실명이 될까봐 수용소 안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아차하면 총을 쏴서 사람들을 정리하겠다는 결의만 있어요. 그러니 수용소 안의 상황이 지옥처럼 아수라장이 된 들 그들과는 상관없는 일인거죠.
수용소 안의 무뢰한들은 발빠르게 한 병실을 차지했어요. 원래부터 맹인이었던 사람, 이제는 제일 잘 만지고 알 수 있는 사람을 회계로 삼아 식량을 탈취하고 식량을 다른 병실과 거래하는 조건으로 악마같은 윤간을 여자들에게 저질러요. 수용소 안은 그야말로 무법천지예요. 배고픔에 싸우고 다름에 폭력을 휘두르고 여자들은 고통에 울부짖고 죽는 일까지 벌어지죠. 단 한 사람, 의사의 아내는 실명된 남편을 지키기 위해 자신도 눈이 멀었다면서 따라온 사람이예요. 눈이 멀지 않아서 이 모든 끔직한 장면을 봐야 했고 눈 뜨고 악마 같은 험한 꼴을 당해야 했어요. 목소리가 그 존재였으니까요. 의사의 아내가 끝까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킬 수 있을지...
"본다." 내 자신에게 물어보게 되더라고요. 눈이 부시도록 만드는 정체는 뭘까. 자본주의 시스템이나 사회주의 시스템이나 사회의 시스템이 너무 견고해지면 인간은 봐야 할 것들을 못 볼 수도 있어요. 시스템은 시스템에 적합한 인간들을 길러내죠. 그럴수록 인간 안에 있는 살인을 저지를 본성, 폭력을 휘두를 본성, 남이 옆에서 죽어가도 내 배를 채우려는 본성들이 세력확장에 들어가나 봐요. 누구에게나 야수적인 면이 있잖아요. 어떤 상황만 되면 튀어나오는 잠재된 인간의 공격적인 본성들, 나라고 다를 이유는 없지요. 나도 짓뭉개지면 살인을 저지를 수 있고 폭력배가 될 수 있어요.
읽는 순간 너무나 황홀했던 장면이 있어요. 상상할 수 없는 험한 일을 당하고 억만년의 분비물이 달라붙은 것처럼 더러워질대로 더러워진 사람들. 수도관이 파열되고 전기도 다 나가버리고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코가 썩을 듯한 악취 마저도 감내해야 했던 사람들이 맞이한 물과 비. 몸을 닦을 수 있는 수건 한 장으로 몸을 닦고,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 한 잔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환희에 찬 사람들, 비를 맞으며 세 여인이 더러워진 신발을 빨고 신발보다 더 더러워진 몸을 씻어내고 마음을 씻어내며 손을 잡고 눈은 두 개지만 손과 다리는 여섯개인 우리는 한 사람이라며 빗속에서 첨벙거리던 장면. 이 장면을 읽을 때에는 숭고해지기까지 했어요.
물 한잔을 마시는 행동도 성스러운 의식이었어요. 잊혀지지 않아요. 내가 아무런 의식없이 해치우는 일상의 행동들. 거의 대부분의 내 행동. 물 한잔도 성스럽게 마셔야 해요. 비가 내린다면 비가 내려서 내 몸을 적시고 마음을 적시고 대지를 적시며 깨끗하게 씻기는 하늘의 성스러운 의식도 참여해야 해요. 함께 겪어내며 한 마음처럼 되어버린 우정 공동체가 나누는 성스러운 의식. 이 의식을 친절한 말로 잘 치르고 있는지도 돌아보게 되죠. 1분 1초 성스럽지 않은 순간이 없어요. 우리가 치르는 순간의 의식들은 예배드리는 행위만큼이나 성스럽다라는 깨달음을 주는 책이었어요. 성스러운 1분. 성스러운 의식. 이 책을 덮고도 깊이 스며들었는지 문득문득 떠올라요. 그래서 좋은 책인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