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the graduate, 1967)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생각보다 큰 위안과 안정감을 가져다 준다. 통제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불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보잘것 없는 직장이라 할지라도 미래의 모습이 확실하고 이를 내가 정했다면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할 것이다. 매달 매출이 계획대로 나온다면 내가 회사를 꽤 잘 꾸려가고 있다 느낄 것이다. 상황이 어렵다고 느낄 때는 대부분 예상밖의 일 때문에 계획을 불가피 수정해야할 때이다. 내가 처한 상황이 통제가 된다면 하던 고민의 반은 줄어들 것이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삶이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영화 졸업(the Graduate, 1967)은 갓 대학을 졸업한 만 21세의 청년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파티는 자신을 환영하는 부모님을 위시한 부모님들의 지인들로 대부분 구성되어 있다. 이 날의 주인공인 벤자민은 정해지지 않은 미래가 걱정되어 안절부절하며 방에서 좀처럼 나오려 하지 않는다. 파티에 참석한 이들은 저마의 경험을 훈장삼아 그의 미래를 서슴없이 계도하려한다. 정작 벤자민의 고민은 안중에도 없으면서 사회초년생이니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훈계한다. 뛰어난 성적에 대한 칭찬이든 진심어린 조언이든 벤자민에겐 저들의 이야기가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무차별적인 조언들은 그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들은 벤자민 환영의 밤에 참석하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벤자민에게 있어 오늘밤은 꼰대들의 향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수조에 갇혀 같은 자리만 서성이는 멍한 물고기의 신세를 대신 한탄하며 방안에 앉아있던 벤자민의 방에 로빈슨 부인이 들어온다. 어딜 봐도 방인데 화장실인줄 알았다며 능청스럽게 들어오는 그녀를 벤자민은 친절히 안내하려 한다. 매우 당황해 하지만 부모님의 동업자의 아내인 로빈슨 부인에게 무례히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갈수록 대담한 요구를 하는 부인 덕에 벤자민은 결국 로빈슨씨의 집 안에 들어오게 되었고 부인의 딸인 일레인의 방에서 그녀는 벤자민을 유혹한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의 옷을 벗겼지만 로빈슨 부인은 스스로의 옷을 벗었다.
관상용 물고기 신세였던 벤자민은 로빈슨 부인을 통해 일탈을 경험한다. 부모님의 지인과의 불온적인 관계였지만 그에게는 어항 밖으로 한 발 내딛는 계기였다. 어른들의 앞뒤없는 폭언에 아무말도 하지 못하던 그는 점차 세상을 향해 반응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그저 일광욕을 즐기는 것일지라도, 좋아하는 사람을 스토킹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점차 그는 남이 아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 나선다.
로빈슨 부인과의 첫경험에 우왕좌왕하거나 일라인을 찾아가 그녀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모습은 행복을 향한 벤자민의 여정이었다. 통제하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들어가고 있던 그는 통제가능한 내가 있음에 위안을 얻고 오늘 내가 하기 원하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가기로 선택한 길 곳곳마다 버티고 서있는 꼰대들은 윽박지르듯 그를 노려본다. 그래서 결혼식장을 뛰쳐나온 직후 환희에 겨웠던 두 사람의 표정은 이내 어두워지고 만다. 이제 그들의 앞에 기다리고 있는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허겁지겁 잡아 탄 버스가 어디로 향하는지 그들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벤자민의 길은 더이상 이전과 같이 막연하거나 불안하지만은 않다. 이제 막 기성세대의 울타리를 벗어난 그는 학업과 편견의 굴레를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개척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진짜 졸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