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처음 고백한 건, 구년 전.
대학에 막 들어가던 봄이었다.
우리는 또다시,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 같은 학교, 같은 과. 오리엔테이션에서도 그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약속은 없었고, 늘 그렇듯 자리가 그렇게 정해졌다.
자기소개가 끝나고, 이름표에 적힌 별명으로 서로를 불렀다. 선배들이 준비한 게임이 한 판 지나가자 테이블마다 술이 놓였고, 종이컵이 돌았다. 누군가는 노래를 틀었고, 누군가는 고기를 굽다 말고 바닥에 앉았다. 긴장은 빨리 풀리고, 웃음은 길어졌다. 종이컵이 탁자 끝을 맴돌다 멈추고, 다시 채워지고, 다시 비워졌다.
과자는 부서진 채 흘러 있었고, 젓가락은 접시 밖에서 쉬고 있었다. 내 잔도 몇 번이나 바닥을 보았다. 그 와중에 재하의 잔만은 처음 모양의 맥주 거품을 그대로 얹고 있었다. 마시기 위해 놓인 잔이라기보다, 자리를 표시하는 표지판처럼.
“야, 우리야. 그만 마셔. 너 방금 네 이름도 더듬었어.”
그가 내 잔을 들어 올리려다 말고, 손끝으로 조용히 밀었다. 나는 그 손을 가볍게 쳐내고 술을 넘겼다.
“그건 일부러 그런 거야.”
입안의 알코올이 생각보다 쓰지 않았다.
“그만 마시래도-”
유리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누가 먼저였는지 모르게 게임이 다시 켜졌고, 안주는 테이블 밑으로 굴러갔다. 한 선배가 짝꿍을 지목하겠다며 이쪽을 가리키는 순간, 시선들이 한꺼번에 이쪽으로 모였다.
그때였다. 멀찍이 앉아 있던 선배 하나가 잔을 들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근데, 너 왜 자꾸 봉우를 ‘우리’라고 불러?”
소음은 그대로였는데, 공기만 살짝 물러난 느낌이 들었다. 웃던 입술이 멈춘 얼굴들이 몇 개. 잔을 입에 대려던 동기 하나는 그대로 멈춰 재하를 보았다. 반쯤 가라앉은 거품, 불이 약해진 불판, 테이블 위에 옅게 맴도는 연기. 별일 아닌 장면들이 한 번에 선명해지는 순간.
궁금한 눈빛도 있었고, 그냥 구경하는 표정도 있었다. 누군가는 벌칙이 더 재미있어지길 바라는 얼굴이었다. 재하는 대꾸를 미루었다. 잔을 내려놓았다. 종이컵이 테이블 표면을 긁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들렸다.
“설마, 너네 사귀냐?”
다른 선배 하나가 술잔을 흔들며 웃었다. 말끝을 따라 웃음이 번졌고, 옆자리 누군가는 “오, 진짜~” 하고 소리를 보탰다. 그러면서도 모두가, 눈은 재하에게로 가 있었다.
재하는 웃었다. 크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웃음. 익숙한 얼굴로 잔을 내려놓았다. 해명도 부정도 없이, 웃고 마는 표정. 나는 그 웃음을 안다. 웃음이 깊어질수록, 그것이 대답의 자리라는 걸.
맥주잔에 남은 거품을 한참 보다가, 나도 웃음을 따라갔다.
사실,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그가 왜 나를 그렇게 불러왔는지. 아주 어릴 적, 봉우리. 아니면 그냥 우리. 그가 그렇게 부르기 시작하면서 내 별명은 자연스럽게 봉우리가 됐다. 우습게도, 정작 그는 그걸 별명이라고 여긴 적도 없어 보였다. 그냥 나를 그렇게 불렀다. 이유 없이, 오래. 그 이름은 이상하게도, 내 이름보다 더 나 같았다. 조금 더 무방비하고, 조금 더 오래된 내가 들어 있는 이름.
그래서 그가 저렇게 웃을 때면, 가끔 그 이름을 들은 기분이 들었다. 소리 없이, 마음속 깊이 울리는 이름. 말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 잠깐 머무는 순간.
“에이, 선배~ 그런 거 아니에요! 저희 진짜 그냥 친구예요, 완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재하 대신, 내가 답했다. 술기운이 살짝 걸린 발음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눈빛들을 정면으로 받으며. 그 한마디에 잔을 들던 손들이 멈췄다. 웃던 얼굴도, 술을 따르던 손도 잠깐 고개를 들었다. 딱, 거기까지가 그 밤의 정적이었다. 말이 이어질 듯 말 듯 떠다니던 분위기는 내 말끝에 걸려 멈칫했다.
“아 뭐야~ 재미없게.”
선배가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실망도, 흥미도 오래 머물지 않는 얼굴이었다.
순간이 지나자 중심은 금세 다른 쪽으로 옮겨갔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시작될 것 같던 관심은, 잔에 남은 거품처럼 서서히 가라앉았다. 떠들던 소리들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테이블 위엔, 말로는 채워지지 않는 얕은 무언가만 남았다. 재하의 손끝이 컵 가장자리를 한 바퀴 긋는 것을 보았다가, 그 시선은 내 옆을 스쳐 흘렀다.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
어쩌면,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대체로 관계는 그렇게 흘러간다. 질문이 던져지고, 대답이 나와도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넘기고, 누군가는 의미를 붙인다. 또 누군가는 애초에 의미가 있었냐고 묻는다. 그런 밤이었고, 그런 사람들 사이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 있었다. 특별한 이유도, 뚜렷한 맥락도 없이.
등을 등받이에 붙이고 숨을 깊게 들이켰다. 머릿속이 둔하게 울렸다. 천장 조명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눌러 두었던 무언가가 더는 눌러지지 않았다.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잠깐 기울었지만 곧 중심을 잡았다. 그 잠깐을 재하는 놓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나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잠깐… 화장실 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일어나더니 팔꿈치 아래를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붙잡는 것도, 보내는 것도 아닌, 스치듯 지나가는 접촉이었다. 순간, 그 미묘한 온기가 팔을 타고 번졌다.
“잡지 마. 나 혼자 갈 거야.”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하자, 그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런데도 손길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비틀거림을 들키지 않으려 애써 걸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뒤를 걸었다. 숙소 바깥 화장실 앞까지. 우리는 한마디도 없이 나란히 걸었다.
“화장실 안까지 따라오려고?”
“못 할 것도 없지만, 참을게.”
“나쁜 놈.”
문을 밀고 들어갔다. 바닥엔 물기가 얇게 번져 있었다. 안쪽 칸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바지와 속옷을 내리고, 차가운 변기에 천천히 몸을 앉혔다. 그 냉기가 엉덩이를 파고드는 순간—문득, 그가 보고 싶어졌다.
“재하야, 거기 있어?”
“응.”
낮고 단정한 목소리가 칸막이 너머로 스며들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 잔잔하게 닿았다. 그 순간, 너무 갑자기 나는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취기 때문이 아니었다. 심장이 먼저 데워지고 있었고, 그 열기는 얼굴에서 눈 끝까지 조용히 번져갔다.
“재하야.”
“왜. 나 어디 안 가.”
그의 목소리가 벽을 타고 울렸다. 말끝이 짧게 닿았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귓가엔 물방울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천장에서인지, 오래된 수도관에서인지 모를 소리. 벽은 축축했고, 손등 위로 희미한 냉기가 감겼다. 시선은 바닥에 번져 있는 물자국에 멈췄다.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나… 너 좋아하나 봐.”
말이 나오는 것도, 그 말이 고백이 되어버리는 것도, 오래전부터 준비된 일처럼 자연스러웠다.
그 뒤로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릎 위에 두었던 손끝에서 힘이 빠지고, 마음이 천천히 바닥으로 기대듯 내려앉았다. 그 틈에, 재하의 그림자가 문 아래 좁은 틈을 타고 번졌다.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침묵이 오히려 어떤 말보다 더 명확했다.
“나와서 얘기하자. 거기서 뭐 해.”
나는 조용히 일어섰다. 청바지가 허벅지에 걸렸다가 천천히 올라왔다. 등에 말려 올라간 후드 티 밑단을 정리하고, 손을 뻗어 물 내림 버튼을 눌렀다. 철컥, 물이 쏟아졌다. 잠시 그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대답해 주면 나갈게.”
잠깐의 정적. 그리고 낮은 숨 같기도 한 웃음이 아주 짧게 끊겼다.
“우리야.”
그가 불렀다.
“나는 우리가 그냥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아. 너도 그렇지?”
그렇게 말하며 문을 향해 한 발 내디뎠지만, 손잡이는 잡지 않았다. 그 자리에 그대로 멈췄다.
“나와서 얘기해. 예진 선배 왔어.”
“아니. 지금 할 거야. 대답해 주기 전까진 안 나가.”
문 너머에서 작은 웃음이 흘렀다. 이어서 다른 목소리.
“안에 봉우야? 무슨 대답?”
예진 언니였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저었다는 걸, 말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그 웃음의 결이 그랬다. 익숙한 부정. 조용하고도 익숙한 부정. 무언가를 피하면서도 피하지 않는 방식.
나는 변기 앞에 서서 두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무릎을 가볍게 굽혔다 폈다. 그 사이, 심장은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야.”
“… 아무래도 좋아. 그냥 네 마음.”
그는 한참 말이 없었다. 나는 그 침묵이 내 심장보다 먼저 바닥에 닿을까 봐, 한 손으로 변기 뚜껑을 다시 내렸다. 그리고 들려온 말.
“난 아니야. 우린 그냥 친구잖아.”
문을 열었다. 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낯선 공기가 뺨에 얹혔다. 나는 고개를 돌렸고, 눈앞엔 예진 언니와 재하가 서 있었다. 나를 본 그녀가 몸을 움찔했고, 입술이 조금 열렸다가 닫혔다. 말을 하려다 멈췄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화장실을 쓰지도 않은 채 돌아섰고, 그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만큼은, 그녀가 돌아간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었다. 바닥은 젖어 있었고, 공기는 차가웠다.
나는 아직 감정 속에 있었고,
그는 이미 현실로 돌아간 사람 같았다.
“거짓말.” 내가 말했다.
“정말이야.” 그가 대답했다.
“거짓말이잖아.”
입술이 떨렸다. 눈동자에 얇게 물기가 번졌다. 분노와 추위가 뒤엉켜, 이가 닿을 때마다 마찰음이 났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떨렸다.
“지난 십 년을 친구로 지냈잖아. 이게 친구가 아니면, 뭐겠어.”
그의 말. 문장보다 긴 침묵이 먼저 닿았다.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딨어.”
말보다 마음이 먼저 무너졌다.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에 온몸을 걸고 있었다.
“들어가자. 춥다.”
그가 팔을 당겼다. 나는 그대로 멈춰 섰다. 발끝에 힘을 주어, 끌려가지 않으려 했다. 그의 손에 매달린 내 팔이 잠시 팽팽하게 버텼다.
“난 아직 대답 못 들었어.”
“대답했잖아.”
그 말이 가슴 안쪽 어딘가를 조용히 무너뜨렸다. 들리지 않을 만큼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내려앉는 감정이었다.
“나, 상처받았어. 너한테.”
그제야 그의 얼굴에 어렴풋이 당황이 스쳤다. 하지만 아무 말도 없었다.
“넌 항상 나한테 진심이 아니야. 그렇지?”
내 말에 그는 내 팔을 붙잡았다. 그 손을 꼭 쥐었다가, 천천히 떼어냈다.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이야. 다만, 아직 모를 뿐이야.
알게 될 때까지 기다릴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한 방식이었다. 늘 그랬듯, 조용하고 확신 없는 긍정. 그 웃음이, 또 한 번 눈물샘을 건드렸다.
“그때가 되면 꼭 말해줘야 해. 알겠지?”
“알겠어.”
일 년도 아니고, 한 달도 아니고, 그저 일주일쯤이면, 그가 말해줄 거라 믿었다. ‘생각해 보니, 나도 너 좋아했었어.’ 그 말이 돌아올 때까지 며칠만 견디면 된다고, 어리석게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은 틀렸다. 완전히, 어처구니없을 만큼 엉망으로. 그날 이후, 거의 십 년이 흘렀고 그 말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에 나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속은 이미 조용히 갈라지고 있었다. 익숙한 얼굴, 익숙한 말투, 그 모든 것이 반복되었지만- 마음만은 조금씩 낯설어지고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게 내가 망가지기 시작한 밤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