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보다 오래가는 감정

by 이랑

카페의 소리는 얇았다. 네 개뿐인 테이블 중 두 개가 비어 있었고, 커튼은 반쯤 젖혀진 채 바람에 한 번 들썩였다가, 힘을 잃은 듯 느릿하게 내려앉았다. 낮은 재즈가 기계음에 얹혀 미끄러지고, 그 뒤로 바람이 길을 찾는 소리가 따라왔다. 식은 커피 앞에서 나는 티스푼 끝을 톡 건드렸다. 설탕 가루가 달라붙어 반짝였다. 별것 아닌 그 반짝임이 자꾸만 눈에 걸렸다.


“좋아해, 이재하.”


말은 컵을 내려놓기도 전에 나갔다. 의도한 것도 아닌데, 말이 먼저 나갔다. 말은 짧았고, 어디 하나 흘러넘치지 않는 문장이었다. 그는 잠깐 내 얼굴을 보고, 고개를 들더니 웃었다. 그게 전부였다.


“웃지 마. 난 진심이야.”
“알아. 근데 귀엽잖아.”


하지만 무엇이 귀엽다는 건지 나는 끝내 알지 못했다. 말투인지, 타이밍인지, 아니면 그 모든 장면 자체가 그에게는 작은 농담이었는지.


‘귀엽다’는 말은 안전했다. 상처를 내지 않는 대신, 마음의 자리를 조금 옆으로 밀어두는 방식이었다. 상대의 진심을 손상 없이 포장해 되돌리는 방식. 포장지는 예뻤지만, 결과는 분명했다. 그러니까, 그건 기분 좋게 포장된 거절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슨 대답이 그래.”
내 말은 바닥에 떨어진 동전처럼 가볍게 울렸다.


“넌 매번 이래.”

내가 그렇게 말했다.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이 문장을 얼마나 오래 반복해 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늘 그랬고, 나는 알면서도 모른 척했고, 그 습관이 쌓이자 어느 날부터 이게 우리 방식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믿음은 편했고, 편한 건 오래간다. 대신 조금씩 닳아갔다.


그는 다시 웃었다. 웃는 데 특별한 의미가 실려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웃을 때가 된 것처럼 웃었다. 감정을 접는 데 능숙한 사람이라는 걸 나는 오래전부터 알았다. 지금도 그는, 마음을 닫은 사람처럼-아니, 애초에 보여줄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담백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물 잔 속 얼룩은 가장자리가 옅어졌다. 금세 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잠시 더 두기로 했다. 닦아 없애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겠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라는 걸, 적어도 오늘만큼은 기억해두고 싶었다. 물 잔에 다시 시선을 두었다. 잔은 이미 텅 비어 있었고, 얼룩은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퍼지고 있었다.


닦지 않으면 번진다는 걸 알면서도, 손이 가지 않았다.

사랑도 가끔 그런 식으로 남는다. 빨리 사라질 줄 알았는데, 아무도 지우지 않으면 결국 누군가의 시야를 오래 점유하는 방식으로.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나도 굳이 묻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이 한 호흡처럼 놓였다.





그 애는 늘 내 옆에 있었다. 팔만 뻗으면 닿을 거리. 그러나 끝내 닿지 않는 거리. 손끝을 조금만 더 내밀면 될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 그 거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마음은 더 멀었다. 나는 그 애에게서 마음을 받은 적이 없고, 그 애 역시 나에게 마음을 준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도, 그 마음도, ‘내 것’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우리가 처음 마주친 건 일곱 살 무렵이었다. 그의 가족이 옆집으로 이사 오던 날, 나는 창가에 앉아 있었고, 그는 현관 앞에서 엄마 손을 잡고 서 있었다. 그는 나를 봤고, 나는 그걸 알아챘지만, 창문 너머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뒤로 몇 해 동안, 같은 골목을 지나며 인사 없이 스쳐갔다. 서로를 알고 있었지만, 굳이 말은 하지 않았다. 창문 아래로 덩굴이 자라 여름이면 잎이 창턱을 덮었고, 그는 가끔 그 잎을 밀치며 지나갔다. 나는 그 장면을 창밖 풍경의 일부처럼 기억했다.


그때의 우리는, 서로를 알기엔 너무 어렸고, 낯섦을 넘기기엔 담장이 조금 높았다.


아홉 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말을 나눴다. 나는 급식소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었고, 그는 맞은편에 앉았다. 인사도 없이 식판을 내려놓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대단치 않은 말을 건넸고, 나도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그게 전부였다. 그날 이후 나는 그를 피하지 않았고, 그도 나를 피하지 않았다. 그게 우리가 가까워진 전부다. 누가 먼저 좋아했는지, 누가 먼저 마음을 줬는지, 따져볼 필요도 없는. 가까워졌지만, 닿진 않았다. 그것이 우리 방식이었다.


그로부터 이십 년쯤 흘렀다.

그의 얼굴은 이상하리만치 변하지 않았다. 새롭지도 않고, 낡지도 않은- 익숙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무언가. 솔직히 말하면, 지겨웠다. 그렇게 지겨운 사람을 아주 오랫동안 좋아했다. 그게 내 유일한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같은 동네에서 자랐고, 같은 교복을 입었고, 같은 강의실에 앉았다. ‘늘 옆에 있었다’는 말이 우리 사이에서 낭만적인 의미로 쓰인 적은 없다. 그는 오래된 가구처럼 그 자리에 있었고, 누구도 그것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조차도.


중학교 때, 재하와 내 사이에 처음 소문이 돌았다. 붙어 다니는 시간이 길었고, 애들은 그런 걸 오래 묵히지 않았다. 그 일로, 내가 좋아하던 선배와는 아무 이유도 없이 멀어졌다. 설명도, 사과도 없었다. 나의 사랑이 그저 그렇게 끝났을 때도, 그는 덤덤하게 말했다. “괜찮아. 그들의 관심도 금방 식을 거야.” 그 말이 진심이었는지, 그냥 할 말이 없어서 나온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그 문장을 오래 기억했다. 왜였을까. 아마 말투보다 표정이 더 조용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좋아했고, 미워했고, 다시 좋아했고, 때로는 피했다. 마음은 언제나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고, 그의 이름은 내 안에서 늘 회전했다. 진심이었다가, 농담이었다가, 고백이었다가, 부정이었다가.


이유는 모른다. 그저 그가 너무 오래 곁에 있었던 것뿐이다. 그런데도, 내 수많은 변덕에도 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자리를 비웠다 돌아왔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앉아 있는 사람처럼. 어쩌면 그건 사랑보다 더 오래 남고, 더 분명하지 않아서 더 쉽게 버려지지 않는 감정이었다. 지우지도 못하고, 간직하지도 못하는 감정. 그러니까, 늘 곁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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