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써 다섯 번째였다.
그러니 네 번째에서 멈췄어야 했다.
사람이란 셋이면 알아차리고, 넷이면 물러설 줄 알아야 한다. 다섯이면, 그것은 더 이상 애정이 아니라 체념에 가까운 미련이었다.
어디까지가 자존심이고, 어디부터가 미련인지조차 분간되지 않는 마음을 눌러 담아 꺼낸 고백이었다. 결과는 매번 같았지만, 시도할 때마다 결은 묘하게 달랐다. 그의 표정이 달랐고, 말투가 달랐고, 내가 견뎌내야 하는 침묵의 길이도 달랐다.
그래서였을까. 거절은 늘 같은 문장이었으나, 실망은 매번 다른 얼굴로 찾아왔다. 어떤 날은 잠 못 든 새벽처럼 옅었고, 어떤 날은 커피잔 바닥에 남은 얼룩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그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균열이 났다.
그를 사랑한 지난 십 년 동안,
전혀 연애를 하지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 연애는 때로는 진지했고, 때로는 형식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사랑이라 부르기엔 어딘가 모자랐고, 외로움을 달래기엔 지나치게 건조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관계들로, 그와 나 사이의 무게를 맞추려 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을보면- 그가 조금쯤은 흔들릴 줄 알았다. 질투를 하거나, 마음이 어긋나거나, 아니면 아주 어쩌면, 나를 바라봐 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변함없는 얼굴, 물기를 머금은 듯 투명한 눈빛. 마치 애초에 어떠한 감정도 부여받지 않은 사람처럼.
나는 애써 시선을 거두었고, 그는 애써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곁에 누군가 있으면 그는 잠시 물러섰고, 아무도 없을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히 돌아왔다.
그랬다. 그는 나를 떠나지 않았지만, 단 한 번도 나를 원하지 않았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그는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입술을 닫은 채, 멈춰 있는 내 얼굴을 오래 바라보곤 했다. 나는그 침묵의 결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고, 그는 내 마음을 끝내 언어로 되돌려주지 않았다.
“밥 먹을래?”
“됐어. 갈 거야. 너 혼자 먹어.”
가방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 마실 거야?”
“그래야지. 또 차였는데.”
그는 커피잔을 쥔 채, 앉은 자세로 나를 올려다봤다. 짐짓 얄미울 만큼 침착한 눈이었다.
“나쁜 놈. 연락하지 마, 다시는.”
“조심히 가, 우리야.”
그는 웃으며 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때, 귀가 걸렸다. 그 이름. 늘 듣던 호칭인데 오늘은 달랐다. 아무렇지도 않게 불리던 이름이, 갑자기 뭔가 불편하게 들렸다. 마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딱히 특별하진 않은 이름이었는데, 또 특별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는- 방금, 그가 아무렇지 않게 불러버린 이름 때문에 심장 한쪽이 톡, 튀었다.
문손잡이를 잡은 손끝으로 식은 감각이 번졌다. 발걸음을 멈추고 발끝으로 바닥 먼지를 얇게 밀었다.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테이블 앞에 다시 섰고, 내 그림자가 그의 상 위로 길게 드리웠다.
“그리고 너, 나 앞으로 그렇게 부르지 마.”
그가 고개를 들었다.
“괜히 특별한 것 같잖아. 그것도 재수 없어.”
그 말을 던지고 나서야, 돌아서서 카페 문을 세게 밀어 열었다. 턱을 넘자마자 걸음을 세웠다. 울지 않으려 했는데 바람이 눈을 찔렀다. 시큰거림이 번지고 물기가 금방 차올랐다.
이상했다. 이럴수록 오히려 그가 더 좋았다. 좋아한다는 마음은 점점 무게를 올렸고, 애틋함은 식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안쪽을 조용히 갉아먹기 시작한 쓴 약처럼- 삼킨 적도 없는데 목 아래 어딘가에서 이미 퍼지는 독처럼.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 사실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늘 곁에 있었다. 그건, 어쩌면 나에겐 사랑보다 더 잔인한 일이었다.
손등으로 눈가를 훑고 고개를 들었다.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익숙한 이름들 위로 스치다가 한 곳에 멈췄다.
[석호 선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선배.”
“응, 봉우야.”
“나… 또 차였어요.”
수화기 너머에서 그는 아마 혼자 웃었을 것이다. 입꼬리만 올라가고, 말끝은 흐려지는 그 습관대로. 그 웃음이 들리지 않아도, 이미 다 아는 얼굴이었다.
“어디로 갈까?”
“오늘은 그냥 선배 집에서 놀래.”
대학 1학년 때부터 그는 늘 나와 재하 사이를 흥미롭게 바라봤다. 그 이상한 관계를 곁에서 지켜보며, 지치지도 않고 장난처럼, 가끔은 흥미롭다는 듯이 지켜봤다. 그게 아주 싫지는 않았다. 내 감정이 너무 무거워서, 누군가라도 가볍게 대해줘야 견딜 수 있는 날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택시에 올랐다. 몸이 시트에 깊이 눌렸고, 등을 따라 푹신한 압력이 번졌다. 창밖으로는 물기 말라붙은 간판이 하나씩 지나가고, 전봇대 아래에 쌓인 먼지가 헤드라이트에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차 안은 조용했다. 라디오에선 뭐가 흐르고 있었지만, 말끝을 놓친 사람처럼 멜로디는 자꾸 어긋났다. 뒷좌석 등받이 위에 걸쳐진 내 손끝이 작은 진동에 따라 미세하게 떨렸다. 고개를 돌리니 창문에 내 얼굴이 어둡게 묻혀 있었다. 바깥 불빛이 몇 번쯤 비쳤다가 흘러갔다. 그걸 따라 시선이 움직이긴 했지만,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선배 집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 몇 캔과 소주 한 병, 손에 잡히는 과자를 집었다. 가벼운 비닐봉지를 들고 골목을 걸었다. 안쪽에서 캔들이 부딪히며 짤랑거렸다. 그 소리에 마음이 조금 내려앉았다. 봉투 겉면이 차가운 물기로 축축했고, 냉기가 손바닥으로 번졌다. 물방울이 손등을 타고 미끄러졌지만 닦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 가방도 풀기 전에 식탁 위에 봉투를 내려놓았다. 캔 밑면이 나뭇결을 톡, 두드렸다.
“그 자식은, 이상해. 이상해도 너무 이상해. 선배가 봐도 그렇지?”
“조금?”
석호 선배가 봉투를 뒤적였다. 비닐봉지 안에서 캔이 부딪히는 소리가 가볍게 흘렀다. 눅눅한 바람이 열린 창으로 느릿하게 스며들었다.
“조금은 무슨. 완전 미친놈야.”
그가 웃었다. 나는 캔 하나를 손에 올려두었다가 식탁 끝으로 밀었다. 들뜬 금속 표면 위로 물방울이 맺혀 있고, 빛이 그 위에서 얇게 번졌다.
“벌써 마실 거야? 아직 해도 안 졌는데.”
그는 벽에 기대 선풍기를 발로 밀었다. 윙- 하는 소리가 가만히 방 안을 돌았다.
“그거 있어요? 그때 봤던 영화.”
창밖 매미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방 안은 한 톤 낮은 기계음과 잔소음들로 채워졌다. 그의 집은 예전 그대로였다. 온도도, 냄새도, 공기의 흐름도- 처음 이곳을 찾았던 8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수만 조금 넓어졌을 뿐. 익숙하다는 사실이 마음을 눕혔다.
그가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밝은 화면이 벽을 덮고, 익숙한 오프닝 음악이 바닥으로 흘렀다. 소파에 앉아 손에 든 캔을 굴렸다.
“선배, 나 진짜 걔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차가운 표면이 손끝을 따라 돌았다.
물기가 묻었지만 감각은 더뎠다.
“근데 재하가 그런 사람이란 거, 처음부터 몰랐던 건 아니잖아.”
“그건 나도 안다고요.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요. 매번 이렇게 밀어내는 게,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는 것처럼.”
소파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젖혔다. 낯설지 않은 천장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벽 쪽으로 길어진 그림자가 방을 타고 누웠다. 낯선 건 오히려 지금의 내 마음 쪽이었다.
“그래도 난… 재하가 너를 싫어해서 그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냥, 표현을 못 하는 거겠지.”
부엌에서 잔 부딪는 소리가 났다.
“선배, 그런 얘기 다 필요 없고…”
숨을 고르는 대신 내뱉었다.
“오늘은 그냥 내 편만 해줘요.”
양팔을 끌어안듯 모았다. 술이든 말이든, 아무거나 안으로 들어와 채워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알겠어. 여기 앉아서 편하게 있어. 맥주 마시고 영화 보자.”
유리가 맞닿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그마저도 조금은 숨통이 트였다.
그가 다시 리모컨을 눌렀다. 몇 번의 클릭 뒤에 익숙한 첫 장면이 어둠 위로 떠올랐다. 화면이 굴러가자, 잊었다고 믿었던 기억이- 아니, 물속에 눌러 두었던 감정이 불린 스펀지처럼 서서히 위로 떠올랐다.
이젠 너무 익숙해져 버린 영화. 그날, 재하에게 두 번째 고백을 거절당하고, 이 집의 거실에 앉아, 울면서 봤던 영화였다. 슬프다기보단 멍한 마음으로 반복되는 장면을 바라보며, 그때도, 지금도 같은 사람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