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그날부터였을 것이다. 석호 선배가 나와 재하 사이, 그 어정쩡한 틈으로 조용히 스며들기 시작한 건.
이상할 만큼 정신이 또렷했다. 잔이 몇 번 비워졌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술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촉감, 어깨를 스치는 소매, 바닥에 구르는 얼음 조각, 그리고 멀리서 묻어 나오던 웃음소리까지- 하나하나가 낡은 필름처럼 내 안에 겹겹이 새겨졌다.
테이블 끝, 재하가 여자애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의 농담에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 표정. 늘 나에게만 보이던 것이라 믿어왔던 얼굴. 나는 맞은편에 앉아 잔을 들이켰다. 눈앞의 장면이 더 선명해질수록, 오히려 내 안은 멍해졌다.
그날은, 내가 그에게 고백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나는 그 시간만큼을 스스로에게 기한처럼 건넸다. 아무 대답도, 감정도 받지 못했지만, 혼자서 ‘유예’라 이름 붙이고 버텼다. 어쩌면 나만의 약속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웃음을 본 순간, 그 약속은 무너져 내렸다.
술이 목을 타고 내려갈수록 속은 천천히 데워졌다. 어디까지가 취기였고, 어디서부터가 분노였는지- 더는 분간할 수 없었다. 조금쯤 취기가 오른 무렵,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있던 여자애가 젓가락으로 계란말이를 집다, 자신의 옷 위에 흘렸다. 그것을 흘깃 쳐다본 그는, 조용히 휴지를 뽑아 그녀의 옷깃으로 손을 뻗었다. 재하의 손이 그녀에게 닿기 직전, 나는 의자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 의자 다리가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그도 손을 멈춘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 상태로 숨을 한번 들이켰다. 취기와 분노의 경계가 무너질 즈음, 말은 불쑥 터져 나왔다.
“좋아해. 이재하. 이 나쁜 놈아.”
공기가 얼어붙었다. 웃음소리도, 술잔 부딪히던 소리도 모두 꺼져버린 듯했다. 남은 건 내 목소리뿐. 너무도 쉽게 내뱉은 것 같았지만, 실은 오랜 침묵 끝에 흘러나온 고백의 파편이었다.
재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몇 초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에서야, 나는 그를 따라가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문 앞을 나서자, 그는 가게 앞에 서 있다가 힐끔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
대답이 없었다. 등 뒤로 바람이 지나가고, 그의 어깨 위로 짙은 그림자가 얹혔다. 걸음은 멈추지 않았고, 나도 멈추지 않았다. 화가 난 걸까? 정말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침묵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껏 내게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기에, 그 조용함이- 이상할 만큼 낯설었다.
“어디 가냐고.”
그가 걸음을 멈췄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집. “이라는 짧은 한 마디가 그의 입에서 떨어졌다. 나는 주춤하다, 결국 그 앞을 막아서듯 뛰어갔다. 그는 놀라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볼 뿐. 그 눈동자엔 아무것도 없었다.
“대답해 줘.”
“집에 가자.”
“재하야… 대답해 줘.”
말이 없었다. 바람이 고막을 스치고, 눈이 시리도록 차가웠다.
“술 깨고, 내일 얘기해.”
“술 안 취했어.”
바람이 스쳤다. 나는 그의 앞을 막아섰고, 손목을 붙잡았다. 차가운 맥박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떨고 있는 건 나였다.
“… 좋아해.”
그는 말 대신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늘 그러했듯, 말보다 손길이 먼저였다. 그 익숙함이 오히려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 순감 눈물이 터졌다.
“집에 가자, 우리야.”
그의 손은 힘을 주지 않았지만, 그대로 이어져 있었다. 몇 걸음 함께 걸었으나, 이대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걸을 수는 없었다. 나는 손을 뿌리치고 달려 나왔다.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그가 오지 않으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술집 앞에 주저앉아 울었다. 얼굴이 엉망이 되든, 콧물이 입으로 들어오든 상관없었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등 뒤로 인기척이 스쳤다. 석호 선배였다. 내 외투와 가방을 들고 나와, 말없이 내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집이 어디야?”
“안 가요.”
그 무렵, 나는 재하와 함께 살고 있었다. 오래된 빌라. 현관을 열면 바로 보이는 거실, 벽에 붙은 낮은 소파. 재하는 늘 그곳에 앉아 있었다. 리모컨을 쥔 채 무심하게 채널을 돌리며, 그러나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사람. 인사를 하기엔 멀고, 모른 척하기엔 너무 가까운 거리. 오늘도 그 자리에 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집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석호 선배는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차창 너머의 불빛이 그의 얼굴 위로 겹쳐졌다. 그러다 잠시 고개를 기울이며 어이없다는 듯 작게 웃었다.
“예진이도 많이 취했고, 지금은… 널 챙겨줄 사람이 없어 보여서. 내 집이 가까우니까 잠깐 쉬었다 가던지.”
그의 목소리엔 설명과 망설임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 손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서 갈등을 벌이고 있는 듯했고, 입술은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했다.
“아니면, 뭘… 어떻게 챙겨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그렇다고 버리고 갈 수도 없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울음이 다 가시지 않은 얼굴로.
그는 휴대폰을 꺼내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택시를 불렀다. 우리는 술집 간판 아래에서 말없이 서 있었다. 세게 불지도 않는 바람이 뺨과 손끝을 파고들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눈가에 말라붙은 눈물이 바람에 스치자, 숨이 짧게 떨려 나왔다. 몸은 냉기에 닿을 때마다 조금씩 접혀 들어갔다. 그의 시선이 내 어깨에 머물렀다. 주머니 속 손이 움찔했지만, 끝내 꺼내지 못했다. 대신 조심스레 입술이 열렸다.
“옷, 벗어줄까?”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내 옷깃을 더 여몄다. 그의 코트 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멈췄다.
잠시 후, 택시가 골목으로 들어왔다.
그는 문을 열어 나를 먼저 태웠다. 차 안은 미지근했고, 창문에는 김이 얇게 맺혀 있었다. 택시는 말없이 골목을 빠져나갔다. 간판 불빛이 차창을 스치고, 뒷유리에 비친 거리의 색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나는 창에 기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감정이 가라앉는 건지, 술기운이 빠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휴대폰을 몇 번 들여다보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몇 번 말도 섞어본 적 없는 사이. 그런 우리가, 이 밤 같은 차 안에 있었다. 낯섦과 익숙함이 뒤섞인 거리. 침묵은 불편했지만, 이상하게 위로처럼 느껴졌다. 말이 없어서 다행이었고,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
택시는 그의 집 앞에 멈췄다. 브레이크조차 요란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내려 조용히 현관문을 열었다. 복도 안쪽에서 불이 켜졌다. 나는 잠시 멈칫했으나, 곧 신발을 벗었다. 안쪽은 따뜻했다. 덜 채워진 난방의 냄새와, 잠시 비어 있던 집 특유의 공기. 나는 그 온기에 기대듯 들어섰다. 생각하기엔 너무 피곤했고,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엔 이 밤은 길었다. 잠시 후, 그는 주방에서 커피를 내려 내 손에 머그잔을 쥐여주었다. 나는 담요를 덮고 잔을 꼭 붙잡았다. 너무 얼어붙은 손끝이 뜨거움에 따끔거렸다.
그 추위 속에서,
그 자식은 나를 그렇게 두고 떠나버렸다.
TV 화면이 환하게 빛나며 영화가 시작됐다. 그를 따라 처음 이곳에 왔던 그날 함께 봤던, 손예진과 조승우가 나오는 영화였다. 그때 나는 영화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펑펑 울었다. 사실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누군가 옆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더 슬퍼진 밤이었으니까.
“이거 보고 또 우는 거 아냐?”
석호 선배가 옆에서 말했다. 나는 웃으려다 말았다. 입꼬리가 움직이기도 전에 멈췄다. 속에 고여 있던 감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이제는 잘 안 울어요. 시간이 좀 지나니까, 어느 정도 무뎌지더라고요.”
나는 그렇게 말했다. 선배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내 쪽을 바라봤다. TV 화면이 그의 얼굴을 흐릿하게 덮었다.
“마음이 무뎌지는 게 어디 있어.”
“역시, 그렇죠?”
내 입술에서 나온 소리는 가볍게 흘렀지만, 속은 여전히 무거웠다. 맞는 말 같았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믿고 싶었다. 무뎌질 수 있다고. 언젠가는 덜 아플 거라고.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지도 않았고, 가슴을 꾹 누르지도 않았다. 그저 화면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울지 않는다고 해서 괜찮은 건 아니었다. 마음 한쪽엔 여전히 닦이지 않는 얼룩 같은 게 남아 있었다. 조명이 꺼지면, 그 흔적은 오히려 더 선명해질 뿐이었다.
나에게 있어 사랑은 언제나 불완전했다. 나는 그 불완전함마저 붙잡으려 했다. 무뎌진다는 건 완전해진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결핍이, 나를 다시 그에게로 데려갔다.
“언제까지 이재하만 좋아할 거야?”
그의 말투는 무심했지만, 그 말은 뾰족하게 꽂혀왔다. 나는 숨을 고르고 가볍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앞으로 딱, 1년만 더요.”
숫자는 망설임 없이 흘러나왔지만, 그 안엔 오래된 감정이 가라앉아 있었다. 아무도 알아채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굳이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무게. 그는 웃었다. 아주 짧게,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익숙하다는 듯, 새롭지도 않은 듯, 입꼬리를 올렸다가 곧 지워버렸다.
“너, 그거 3년 전에도 똑같이 말했던 거 기억나?”
그 말은, 오래 잠들어 있던 감정을 불쑥 건드렸다. 얼굴 안쪽부터 서서히 열이 올라왔다. 잊고 지냈던 장면 하나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때도 그랬다. 재하에게 세 번째 고백했던 그날 밤. 거절은 이상할 것도 없었는데, 유난히 숨이 차올랐던 밤. 나는 울지 않았다. 화도 내지 않았다. 그저 돌아섰다. 그런데도, 그 기억은 당연하게 잊히지 않았다. 잔상만으로도 감정은 버틴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자라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조용히 떠올라, 가슴팍 어딘가를 은근히 데워놓고 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