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태연히 맑은 날이었다. 열여덟의 이월, 겨울의 끝자락. 햇빛은 계절보다 먼저 봄을 닮아 있었고, 바람은 조용히 긴소매 위로 스쳐갔다. 그날, 우리는 여행을 떠났다. 나의 언니인, 봉선 언니와 재하의 형인, 석진 오빠의 대학 입학을 축하한다는 명목 아래, 두 가족이 함께 계획한 여행이었다. 한 달 전부터 달력을 넘기며 날짜를 셌고, 어디로 갈지, 어떤 음식을 먹을지 이야기하며 자꾸 웃었다. 모든 게 환했고, 바람조차 오래 머물던 시절이었다.
두 대의 차가 나란히 길을 나섰다. 앞차에는 재하의 형과 내 언니, 그리고 재하의 부모님이 타고 있었고, 뒤차에는 나와 재하, 그리고 나의 엄마와 아빠가 타고 있었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차 안은 금세 떠들썩해졌다. 라디오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그 노래는 가만히 공기를 헤집고 지나가며, 우리의 숨 사이를 얇게 감쌌다. 우리는 별생각 없이 따라 불렀고, 가사를 모를 때는 그저 흥얼거렸다. 때때로 옆 사람의 어깨를 건드리며 작은 웃음이 번졌다. 창밖으로는 희미한 풍경이 거꾸로 미끄러졌고, 우리는 그 위에 가벼운 이야기들을 얹었다. 특별할 것 없는 말들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낯선 꿈의 조각처럼 반짝였다.
어디로 가는지보다, 지금 이 길 위에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창밖을 스치는 바람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도, 서로에게 건네던 작은 웃음과 목소리도, 그날은 어쩐지 모두 현실 같지 않았다. 빛은 부드럽게 기울고 있었고, 말들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갔다. 그러나 그 안에는 설명되지 않는 온기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그 길, 아무것도 아닌 풍경이 이상할 만큼 또렷하게 가슴에 새겨졌다.
무엇을 해도 괜찮을 것 같은 하루였다. 서로를 웃게 하는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가능한 시간.
잠시 이야기가 끊긴 틈에, 나와 재하는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눈을 감았다. 앞유리에 내려앉은 햇살은 잔잔했고, 차 안에는 말없이 흐르는 평화 같은 것이 감돌았다. 그때만큼은 정말로, 이렇게 아무 일도 없이 영원히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딱 그 순간까지는.
“저 트럭 왜 저래? …어, 어…!”
아빠의 목소리가 짧게 갈라졌다. 그리고 다음은 무언가 크게 틀어지는 감각뿐이었다. 차는 휘청거렸고, 방향을 잃은 채 몇 번을 흔들리다 벽에 부딪혔다. 뭔가 깨지는 소리. 창밖이 뒤틀리는 빛. 그리고, 아주 짧은 침묵.
다시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모든 소리가 꺼진 것처럼, 숨소리조차 멀리서 들리는 기분. 하지만 그 조용함과는 다르게, 바깥은 이미 모든 것이 변했고 어지러워져 있었다.
앞서 달리던 트럭은 옆으로 완전히 누워 있었고, 그 밑으로 한 대의 차가, 종이처럼 구겨져 깔려 있었다. 내가 타고 있던 차는 트럭을 피하려 방향을 틀면서 도로 가장자리의 벽에 가볍게 부딪혔을 뿐이었다. 옆자리에 있어야 할 재하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멍한 상태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덮쳤고, 햇빛은 여전히 따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게 더 잔인한 순간이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엄마의 얼굴이었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술을 떨고 있었다.
“어떡해… 어떡해…”
입속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마치 낡은 기도처럼 반복되었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에서 크고 묵직한 눈물이 툭, 툭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그 무게만으로도 땅이 꺼질 것처럼.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도 모른 채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요란스러운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그때 트럭 밑에 깔린 차 앞에 멈춰 서 있는 재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차는 그의 가족과 나의 언니가 타고 있던 차였다.
아빠는 두 팔로 트럭을 밀어보려 애썼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던 재하 역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눈은 그 잔인한 장면에 고정된 채, 손끝 하나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 아이의 마음속에 어떤 풍경이 담겨 있었을까. 짓눌린 차를 바라보던 열여덟의 재하에게는, 그것이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그저 상상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가 겪었을 시간을 생각할 때마다, 내 속은 조용히 뒤집혔다. 그의 마음을 따라 내려가는 것 자체가 숨이 막힐 만큼 아팠다.
나는 그에게로 발을 떼지 못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게 몹시도 두려웠다. 그에게로 가까워지는 일, 그 차 안으로, 그날의 비극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슬픔이라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무게가 사이렌 소리와 함께 피부를 타고 밀려왔다. 그 무게에 눌려, 나는 차라리 멀찍이 서 있었다. 그런데 재하는 천천히 걸어갔다. 단 한 걸음씩. 무언가에 끌리듯이, 혹은 짓눌리듯이. 불길이 퍼지고 있던 차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앞유리가 깨진 틈 사이로 작고 가느다란 손 하나가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유리 조각 위로, 희고 연약한 살결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재하는 그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꼭, 아주 꼭. 그의 얼굴엔 어떤 감정도 명확히 읽을 수 없었다. 다만, 그 손을 쥐고 앉아 있는 재하의 등을 바라보는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부서져 내렸다.
그것이 슬픔인지, 죄책감인지, 아니면 그냥 벗어나고 싶은 감정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날 이후, 재하는 세상에 홀로 남았다.
그 자리에서 모든 눈물을 다 흘려버렸던 걸까. 장례식장에서는 재하의 얼굴에서 단 한 방울의 눈물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거의 무표정에 가까웠고, 조문객들에게는 언제나처럼 예의를 잃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고,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그는 마치 울음 대신, 그저 서 있는 일로 마음을 드러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날, 재하의 얼굴에는 물기 하나 맺히지 않았다. 대신, 그의 할머니가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재하의 손을 꼭 쥔 채, 마치 놓치면 안 될 무언가를 쥐고 있는 것처럼. 작은 어깨가 떨렸고, 흐느낌이 끊어질 줄 몰랐다. 재하는 그런 할머니의 등을 천천히 쓸었다. 단 한 마디도 없이, 단 한 방울의 흔들림도 없이. 아직 다 크지 않은 손으로, 너무도 조용하게. 위로받아야 할 아이가, 오히려 할머니의 등을 쓸고 있었다. 그 작은 손길이 멈추지 않는 동안, 할머니의 울음은 더 길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시간의 방향이 거꾸로 흐르는 듯했다. 아직 어린 그 아이가, 그 순간에는 이미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날, 분명 내 곁에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얼굴이 남긴 빈자리가 있었다. 그 빈자리를 끌어안은 채 흘리던 내 눈물조차, 온 가족을 잃은 아이의 상실 앞에서는 닿을 길이 없었다. 그건 말의 바깥에 있는 감정이었다. 누구도 그를 위로해주지 못했다. 위로라는 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그는 혼자 서 있었다.
우리는, 네 개의 관을 함께 보냈다.
장례식장은 이상하리만치 밝았고, 꽃은 눈이 시리도록 희었다. 조문객들의 울음은 간헐적인 바람처럼 창밖으로 스쳐 지나갔다. 짧고, 흐릿하게, 그 어느 곳에도 오래 머물지 못한 채. 부모님은 언니의 이름을 부르며 울다가, 곁에 앉아 있는 재하를 보고는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그 말이 울음보다 먼저 터져 나왔고, 엄마의 어깨는 조용히, 그러나 크게 흔들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에게 어떤 것도, 건네지 못했다. 말이라는 것이 때로는 너무 크고, 때로는 너무 무력해서,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더 정직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에게 다가가는 일은 손을 뻗는 게 아니라,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처럼 느껴졌다. 조심하지 않으면 발밑이 꺼질 것 같은, 그런 깊이 속으로.
그의 주변에는 두터운 슬픔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말도, 눈물도, 온기도 그 너머로는 닿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 바깥에서 끝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며칠 후, 모든 게 정리된 뒤였다. 재하는 할머니와 함께 우리 집에 잠시 머물게 됐다. 낮에는 문상객들이 들렀다가 조용히 돌아갔고, 밤이면 각자의 방에서 불 꺼진 천장을 바라보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또 며칠쯤 흐른 어느 늦은 오후였다. 우리는 같은 거실에 앉아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다. TV는 켜져 있었지만 소리는 꺼져 있었고, 창밖에서는 바람이 커튼을 가볍게 밀었다. 탁자 위에는 식지 않은 차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나는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다 말고, 옆에 놓인 쿠션의 실밥을 뜯고 있었다. 재하는 소파 끝에 앉아, 종이컵에 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는 물을 마신 뒤에도 한참 동안 그 컵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할머니는 방 안에서 묵은 기침을 몇 번 했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듣고도 서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빠는 늦게 온다고 했고, 엄마는 김을 말리고 있었다. 재하는 몇 번인가 손끝으로 무릎을 두드렸다가, 조용히 숨을 쉬며 몸을 뒤로 기댔다. 나는 그가 앉은 소파 맞은편, 묵은 담요 위에 다리를 접고 앉아 있었다. 차는 식어갔고, TV 화면은 연예인의 얼굴을 멍하니 비추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오래 있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재하야."
그가 고개를 들었다. 느릿했고, 무표정했다. 예전처럼 웃는 눈은 아니었다. 빛도, 흔들림도 없이, 맑고 텅 빈 눈동자가 나를 바라봤다. 그 눈을 마주하는 일은 심장을 서서히 조이는 일 같았다.
"… 괜찮아?"
내 목소리가 너무 작게 흘러나왔다. 그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우리야… 나랑 약속 하나만 해줘."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고, 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앞으로… 그 이야기는 더는 하지 말자. 너한테도, 나한테도… 그건 너무 힘든 일이니까."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TV 화면이 바뀌었다. 조용한 광고 음악이 흘렀고, 화면 속 햇살이 누군가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있었다. 우리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한마디로 우리는 서로의 슬픔을 그저 닫아두기로 했다. 후회도, 기억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일에 조용히 합의한 셈이었다.
재하는 고작 이주일 남짓 우리 집에 머물렀다. 부모님은 학교를 마칠 때까지만이라도 함께 살자고 조심스레 권유했지만, 그는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거절했다. "괜찮아요." 그 한마디에, 누구도 그를 더는 붙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으로 긴 시간 동안 떨어지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모든 소리가 제거된 공간에 들어서는 것과 같았다. 나는 그의 침묵이 그의 모든 말을 소멸시키는 것을 보았다.
그가 시골로 내려간 뒤, 그의 소식은 드물었다. 전화는 걸 수 있었고, 편지를 쓸 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우리는 이미 어떤 말로도 닿을 수 없는 곳에 서 있었으니까. 처음이었다. 서로의 삶에서 조금씩 멀어졌던 건. 마치 서로의 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처럼,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세계에서 살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