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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뺑그이 Aug 08. 2023

수박 주스


수박화채를 먹고 나면 살얼음 수박물이 그득히 남는다. 그 살얼음 수박물이 너무도 마시고 싶어지는 폭염이 이어졌다. 갈증이나던 차에 오며 가며 보았던 카페에 써붙인 '리얼수박주스'가 떠올랐다.  그 카페로 얼른 가서 테이크아웃을 해서 먹어보았다. 하지만 콜라 500ml도 거뜬히 원샷을 하는 나에겐 몇 번 쪽쪽거리니 금방 얼음만 남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나를 더 사자니 목 축이는데 만 원을 쓰는 건 아무래도 좀 아까운 기분이 들었다. 아쉬운 마음에 얼음 사이사이 끼어있는 수박주스를 쪽쪽거렸지만 갈증은 채 가시질 않았다. 그러다 불현듯 큰 양푼에 가득히 수박 화채를 만들어서 원 없이 국자로 막 퍼 먹었던 어린 시절 어느 하루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근아 퍼뜩 와서 여기 엎드려 봐라. 등목해줄께.  별로 안 찹다. 얼른 온나."


난 웃통을 벗으면서도 영 엄마가 못 미더웠다.


"진짜로 안 찹나? 팬티 안 젖구로 조준 잘해서 부야 된데이 알았제?"


"아이고 머스마가 그거 차면 얼마나 다고 엄살 부리노. 시끄럽다 빨리 엎드리기나 해라."


"잠깐만 기다려봐라. 심장마비로 죽을 수도 있다. 심장에 먼저 물 좀 묻히고 으으 찹다. 으으 찹구만 엄마는 맨날 거짓말만 하노."


"아따  참말로 많네. 후딱 엎드려라!"


엎드려뻗쳐를 했다. 엄마가 갑자기 차가운 물을 확 끼얹을까 봐 심장이 두근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엄마 하나아 두우우울 세에에엣 뿌려래. 갑자기 말도없이 확 뿌리면 안 된데이."


"알았다. 자, 하나아아 둘!"


"앗! 차가브라. 셋에 뿌리라니까 왜 둘에 뿌리노!"


"시끄럽다. 이거 봐라. 때구정물 좀 봐라. 하이고 까마귀가 행님아 하겠네. 동네 넘사스르브서 살겠나. 좀 가만있거라! 니는 도대체 어디를 그래 뒹굴고 다니노!"

 

"아, 스톱! 스톱! 등목이면 등에만 비누칠을 해야지 어디까지 비누를 문때노. 엉덩이에 손을 왜 넣는데 이거는 등목이 아니라 완전히 목욕이네 목욕! 반칙이다. 등목 아이다 이거는!"


"짜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야! 왜 때리노!"


"거지도 니보다는 깨끗하겠다. 가만있거라!"


난 한바탕 등목 전쟁을 치르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투덜투덜 털면서 주방으로 갔다. 그리곤 엄마가 시킨 대로 냉동실에서 양푼에 얼려놓은 얼음그릇을 꺼냈다. 양푼에선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차가운데 뜨거워 손이라도 데일 것처럼 조심조심 양푼을 고는 주방 바닥에 양반다리로 앉았다. 난 머리를 털던 수건을 목에 두르고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실뭉치에서 뽑아온 바늘은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으론 식칼을 잡았다. 그리곤 바늘 끝을 입으로 호호 불고는 신중하게 양푼 얼음 한가운데에 꽂고 식칼 손잡이 뒷부분망치 삼아 바늘을 살살 내리쳤다. 바늘이 조금씩 들어가면서 얼음에 번개가 치기 시작했고 지지직 소리를 내며 얼음 지진이 났다. 조금 더 두드리자 얼음은 입을 쩍 하고 벌리며 항복했다.


"아이고 다 더워!"


"하이고 얼른 물 한 번 뿌리구로 웃통부터 벗으소. 근아 아빠 오셨는데 나와서 얼른 인사해야지!"


난 온 신경을 집중해 얼음을 산산조각내고 있는데 아빠가 퇴근을 하고 막 집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바늘과 칼을 놓고 얼른 현관 앞으로 갔다.


"아버지 조심히 다녀오셨습니까!"


"어, 그래. 수박화채 시워워워원 하게 잘 만들고 있나?"


"어, 지금 얼음 깨고 있다! 아빠 덥제? 내가 맛있게 만들어줄게. 조금만 기다려라."


난 평소엔 아빠한테 반말을 는데 아빠가 출근을 하거나 퇴근을 하면 꼭 존댓말로 마중인사를 했었다. 아빠가 출퇴근을 할 때 인사를 안 하면 정말 큰일이 나는지 알고 뭘 하다가도 얼른 총알처럼 튀어나와 인사를 했다. 다시 주방으로 돌아와서 이번엔 엄마가 미리 잘라둔 수박 반통을 바닥에 놓고 이번엔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얼음을 얼린 양푼보다 더 큰 양푼에 숟가락으로 빨간 수박 속살을 떠서 양푼으로 열심히 옮겨 담았다.


"와아! 속이 뻐어어어엉 뚫리네. 시워워워원 하다. 아이고 고마 이제 좀 살겠네."


"내가 만들어서 맛있는 거다! 내가 만들었다! 내가!"


"아이고 고오오마압습니데이. 됐나? 하하하"


우리는 선풍기 앞에 두런두런 모여 앉아서 시원한 화채를 먹었다. 텔레비전에선 야구경기가 하고 있었다. 그때 누나가 집으로 들어왔다.


"어디 갔다 오노? 듭제? 니도 요 와서 시원하게 한 그릇 먹어라."


"안 먹을 거다! 쿵!"


누나는 뭔가 심술이 잔뜩 난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틱 하고 잠가버렸다.


"저, 저, 문 쾅 닫는 거 봐라. 저 요새 저라노? 아부지를 봤으면 일 잘 다녀오셨습니까. 인사부터해야지!"


"하이고 놔 뚜이소. 뭐라카노. 사춘기 그거다이가. 지 안 먹으면 지 손해지 뭐. 근데 근아 니 화채 또 푸나 이제 고만 먹어라. 곧 이따가 밥도 무야지. 니 또 자다가 오줌 쌀라고 그래 먹나! 니는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오줌을 못 가리노. 야가 몸이 허한가. 약이라도 하나 먹이야 되나. 큰 일이네. 살도 안 찌고 삐쩍 말라가지고 누가 보면 일부러 굶기는지 알겠네. 몸이 허하면 자다가 그래 오줌을 싼다던데..."


"약은 무슨 약이고  때는 마르고 그렇지 뭐!"


! ! !


"뭐!"


누나가 소리쳤다.


"문 열어라!"


내가 말했다.


"왜!"


"화채!"


"됐다!"


"엄마가 받을 때까지 문 두드리란다!"


잠깐 정적이 흐르더니 방문이 화채 그릇 크기만큼만 열렸고 그 틈으로 화채는 휙 하고 사라졌다.  주먹을 쥐고 닫혀버린 방문에 휘두르고는 다시 돌아섰다.


엄마는 화채 그릇들을 고 주방으로 가고 있었다. 아빠는 선풍기 앞에 드러누워 그새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난 아빠 옆에 가서 앉았다. 텔레비전에선 지루한 야구경기가 하고 있었다. 야구해설가와 캐스터의 목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들렸다. 


아빠를 보았다.


난닝구를 벗어도 난닝구를 입은 것처럼 그을린 피부. 뜨거운 태양에 파마가 된 듯 더 헝클어진 곱슬머리. 어쩌다 술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면 따갑게 내 얼굴에 비비던 수염 가득한 얼굴. 넓은 어깨. 두꺼운 팔뚝. 어떻게 등을 붙이기만 하면 저렇게 금방 잠이 들어버릴 아빠의 얼굴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폭염의 오후에 얼음만 남은 수박 주스컵을 들고 그날을 떠올리고 서 있으니 내 마음에도 차가운 얼음이 들어앉은 것처럼 한쪽 마음구석이 시려왔다.


아! 이런 날에도 아빠는 매일 일했던 거구나.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더운 날. 하루종일 땀 흘리면서 일하느라 그렇게 난닝구 자국이 선명하도록 검게 그을렸던 거구나. 바닥에 등만 닿아도 아빠는 그렇게 금방 코를 골았던 거구나.


부산시 북구 구포2동 빨간 벽돌집 2층. 장독들이 있었고 그 옆에 화분들도 있었던 우리 가족이 세 들어 살았 이층 양옥집.


넓은 어깨, 굵은 팔뚝, 검게 그을린 난닝구 자국. 아프지 않은 그날의 강인한 아빠의 모습으로 우리 가족이 선풍기 앞에 두런두런 앉아 시원한 수박화채 한 그릇씩 먹었으면 참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컵을 흔들었다.


그새 더 작아져버린 얼음들.


세월의 조각조각도 무더운 날의 얼음 조각처럼 너무도 빨리 녹아내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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