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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뺑그이 Feb 13. 2023

지나고 보니 난 사랑을 엄청 먹고 자랐네요.

[자영업 일기 4편]

[자영업 일기]



친구들과 골목에서 누런 코 훌쩍이며 노는데


뉘엿뉘엿 해 질 녘

집집마다 엄마들이 외칩니다.


석아. 민아. 철아. 희야. 지야. 숙아. 


밥 무라~


겨우 술래를 면한 내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야속해 못 들은 척해보지만.


아빠 화났데이! 지금 안 들어오면 밥 없데이!


밥이고 뭐고 너무 분해서.


야! 술래! 내일 니부터 다시 술래 시작이다! 딴소리하면 죽는다!


희번덕 엄포를 놓고 투덜투덜 집에 들어가니. 


보글보글 찌개 끓는 소리. 파송송. 두부 숭덩숭덩. 딱딱딱 도마소리와 야구 중계 소리를 가르고 지랄 같은 누나가 외칩니다.


! 니는 입만 달고 사나. 퍼뜩 손 씻고 밥이라도 퍼라!


밥솥 뚜껑을 여니 뜨거운 김이 확 오릅니다. 그 그득한 내음이 지금도 코를 벌렁거리게 하네요.


밥을 며 밥상에 놓인 반찬을 훑습니다.


된장찌개. 무생채. 깻잎절임. 고사리나물. 나박김치. 멸치마늘종볶음. 김치.


계란프라이!


내가 좋아하는 고기는 감지덕지 기름칠이라도 좀 된 어묵볶음. 감자볶음 따위는 없지만 아빠 하나. 엄마 하나. 누나 하나. 그리고 내 거 하나. 암묵적 협약인 프라이 개가 그나마 내게 큰 위안을 줍니다.


아빠가 어쩌다 남기면 오늘은 누나한테

더 적극적으로 대항할 것을 다짐하며 밥을 마저 퍼 담습니다.


아빠는 다행히 야구 보느라 성적표 얘기는 안 하십니다.


엄마는 자꾸 이거 먹어 봐라. 저거 먹어 봐라. 귀찮게 풀 반찬만 자꾸 드밉니다. 


누나는 그걸 못마땅한 듯 흘겨보며 밥알을 셉니다.


와아! 쳤다! 와아! 날아간다! 넘어가라! 넘어가라! 아... 저... 아... 저... 아니... 감독. 저.. 와... 감독 저거. 저거. 이해 안 된다. 안 돼.


아! 맞다. 느그 성적표 슨생님이 도장받아 오랬다메?


아...


밥은 다 먹었습니다.



새벽 4시까지 일하고 집에 왔습니다.


먹다 남은 생태탕 데우고 먹다 남은 식은 양념치킨이랑 반주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차릴 수도 없고 어디 가서 먹을래도 팔지도 않는 엄마표 된장찌개. 무생채. 깻잎절임. 고사리나물. 나박김치. 멸치마늘종볶음. 김치.


장사해 보니 그래요.


나 밥 먹으라고 이름 불러주는 사람 없어요. 


나 먹어보라고 반찬 드미는 사람도 없어요.


나를 위해 하루종일 망치질 하고 지친 몸 씻고 발바닥 닦으면서 야구 보는 사람도 없어요.


사회에 나와 보니 그래요.


세상이 얼마나 먹고살기 힘든지. 얼마나 서러운 때려치우고 싶은 상황이 많은지.


무엇보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 신발공장 다니시고 작은 정육점 하셨던 게 사회적으로 얼마나 위치가 낮으셨는지.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 대신 가장 노릇하느라. 동네에서 학교에서 수재 소리 들었는데도 동생들 뒷바라지하느라. 교복대신 작업복 입고 남에 집 논일. 일 하셨답니다.


식아 니 학교 안 가고 논에서 뭐하노.


친구들이 놀렸다네요. 비료 포대 공책 크기로 잘라 동생들 수학 푸는 노트 만들어 주셨답니다. 


동생들 학년은 올라가고 돈 더 준다는 벽돌과 모래를 나르시다가 목수가 되셨습니다. 


사회적 낮은 위치에서 얼마나 설움 받고 고생하셨을지.


장사해 보니

사회에 나와 보니

돌이켜 보니


이제야 알겠네요.


로보트 사달래도 안 사주고. 롤러스케이트 사달래도 안 사주고. 양념통닭. 돈가스 사달래도 안 사줬던 아껴야만 했던 이유를요.


누나 그리고 내 머리가 점점 굵어지니 방 세 개짜리가 필요했겠지요.


교복도 책도 가방 살 돈도 필요했겠지요.


집주인 눈치 안 보고 이사 걱정 없이 네 식구 작은 보금자리 마련하는 꿈을 이루려면.


사회적 낮은 위치에서 아등바등해도 늘 모자람이었겠네요.


이제야 알겠어.


몇 대 몇?


남성팀이 이기면 아빠와 하이파이브. 여성팀이 이기면 누나와 엄마가 하이파이브.


동그란 밥상에 둘러앉아. 가족오락관 보면서 먹던 도란도란 밥상이 참 그립네요.


취하네요. 또 취해요.


밥 먹다 말고 폰 잡고 자판 치며 술만 마시네요. 등짝 맞고 싶네요. 혼나고 싶어요. 잔소리 듣고 싶은 밤입니다.


지나고 보니  사랑을 엄청 먹고 자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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