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술을 자주 마셨던 나는 음식을 먹으면 장이 갑자기 반응을 하곤 했다. 나는 챔피언 나이트에서 만난 썸녀에게 담배 좀 사러 간다고 구라를 치고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은 히노쇼군 후문으로 나가면 상가 복도가 나오는데 복도중간쯤에있었다. 난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 평온을만끽하고 있었다.
"끼익... 또각. 또각. 또각."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별안간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남자 화장실에 왜 들어왔지?처음엔 의아했는데 슬슬 뭔가 불길해져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맙소사! 쓰레기통 안에 생리대가 보였다.
머릿속엔 이미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고 경찰이 출동하고 나는 수갑을 찬 변태로 체포되는 장면들이 눈앞 스크린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눈알과 뇌가 갈피를 못 잡고 빠르게 굴렀다.아무래도하이힐 잘못이 아닌 내 잘못 같았다.
"윽! 누가물 안 내렸나?냄새 쩌내."
문밖 여자가 말했다.
난 손으로 허공에 부채질을 했다.
"야, 니 오늘 쟤랑 잘 거가?"
"안 한 지 좀 돼서 살짝 땡기는데모르겠다."
"니 저번처럼 술 먹고 남자랑 자고 그 남자 연락 안 된다고 질질 짜지 말고 쟤랑 오래 계속 볼 마음이면 좀 참고 그냥 안 볼 거면 니 알아서 하라고. 쟤네 하는 폼이 영 심상치가 않네."
"왜? 잠도 자고 또 보면 되지."
"야이 돌탱크야. 남자들은 쉽게 자고 나면 너한테 금방 싫증 느낀다. 밀당을 해야지. 밀당. 남자들은 안달 나면 그 안달 난 걸 사랑으로 착각한다니까. 니는 그래 남자 만나고도 모르겠나."
"아이고선생 나셨네. 니나 잘해라.저번에 나이트 기억 안 나나."
"야,갑자기 나이트가 왜 나오노. 시끄럽고. 니 솔직히 쟤 마음에 드냐고."
"어, 괜찮은 거 같은데. 키도 크고. 얼굴도 봐줄 만하고."
"그러면 내가 니 술 먹고 째려서수작에 넘어가겠다 싶으면 내가 택시 잡을 테니까. 니도 택시 타라. 알았나?"
"알았다. 나도 막 술 먹고 자고 또 안 보고 그런 인간관계 짜증 난다."
"택시 잡는데 또 안 간다고 더 논다고 버티면서 내 이상한 사람 만들지 말라고.알았나. 가시나야. 분명히 약속했다 같이 집에 가기로. 알았제?"
"알겠다고. 야, 근데 내 여기 마스카라 번졌나? 함 봐봐."
"어디?아직 괜찮다. 근데 니 혹시 립밤 있나."
뿌우우우웅.
난 판도라의상자가 열린 듯한신비로운 여자들의 대화에 빠져들었다가 괄약근에 힘도 빠졌는지 그만 방귀를 뀌고 말았다.
"야, 안에 사람 있다."
"어쩐지 냄새 쩐다 했다. 어우 토할 거 같다."
"가시나야 듣겠다. 조용히 말해라."
"야, 우리 얘기 다 들었겠다.쪽팔린다. 빨리 나가자."
여자들이 나가고 나는 문을 빼꼼 열었다. 히노쇼군은 곧 피크 시간이 되면 손님들이 엄청나게 들이닥치는 가게였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갇혀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얼른 여자화장실에서 뛰쳐나갔다. 나가는 도중 누가 문이라도 열고 들어올까 봐. 엄청 빠른 속도로 뛰쳐나왔다. 상가복도에 나오니 한 세 사람정도가 있었지만 특별히 내게 눈길을 주진 않았다.
휴우우우우우우우우.
문 하나에 천당과 지옥을 오간 기분이었다.
나는 판도라 상자의 주인공들이 누군지 스캔했다. 아직 손님이 많지 않아서 용의자는 금방 포착이 되었다.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둘과 남자 둘 테이블이 있었다. 아니 저렇게 앳된귀여운 얼굴로 아까처럼 대화했다는 게 나로서는 꽤나 큰 충격이었다.
"나 담배 하나만 피고올게."
전 날 마신 술이 문제였다. 1시간 정도 지나서 또 부글부글 신호가 왔다. 이번에는 화장실 표지판을 잘 보고 남자화장실에 무사히 안착했다.
"끼익. 뚜벅. 뚜벅. 뚜벅."
문이 열리고 둔탁한 구두발자국 소리가 났다.
"니는 도대체 아군이가 적군이가."
"왜?"
"아니 이십팔이 도대체 거기서 왜 나오는 건데. 내가 이십오. 이십육. 이십칠까지 밥상 딱 차려줬는데 거기서 이십팔이 뭐냐고. 니 돌대가리가. 이십팔. 이십구 또는 이십팔. 이십구. 삼십. 이렇게 나가야 여자들이 걸려서 술먹을 거 아니가 병신아. 내 술 먹여서 뭐 할 건데. 니 내랑 오붓하게 모텔 가고 싶나. 왜 내가 팔베개라도 해주까. 여자를먹여야지 여자를. 생각을 좀 해라. 대가리는 폼으로 달고 사나."
판도라 상자 테이블에 네 명이 게임을 하느라 시끄럽게 떠들던 장면들을 떠올리며 나는 다시 귀를 기울였다.
"내가 일부러 그랬나. 술 먹다 보면 헷갈릴 수도 있지."
"됐고. 랜덤 게임에 걸리면절대 배스킨라빈스는 고르지 마라.돌대가리야."
"내 할 줄 아는 게임 많이 없단 말이야."
"야, 여기서 나가면 2차로 생맥주 먹던지 아니면 바로준코로 갈 거다. 준코로 가서 노래 부르면서분위기 띄워서 자연스럽게 스킨십까지 가야된다. 니 또 아무도 모르는 엠씨 스나이퍼인지 엠씨 쓰레빠인지 이상한 랩 하지 말고 빅뱅 이런 거. 다 아는 거. 신나는 거. 부르라고 알겠냐고!고해 나오면 바로 취소 누를 거다.고해 좀 부르지 마라."
"내알아서 할게. 니가 무슨 선생이가 뭔데."
"술도 오르고 분위기도 올랐을 때 자연스럽게 우리이제 좀 피곤한데 편하게 방 잡고 술 한 잔 더 마실래? 딱이 스토리로 가야 된다고. 알겠냐고. 노래 부르고 신나서 술만 벌컥벌컥 마시다가 꽐라 돼서 재 뿌리지 말고 파이팅 좀 하자. 제발."
"알았다. 알았다고 이 성의 노예 같은 새끼야. 니 같은 새끼들 때문에 절대 딸은 못 놓겠다."
"야, 근데 이 정도면병원 가서 검진받아야 되는 거 아니가. 장이 썩은 거 같은데?"
난 손으로 허공에 부채질을 했다.
"듣겠다. 조용히 말해라."
남자 둘이 화장실에서 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곧 나도 나왔다. 아주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쌍으로돌아가면서 꼴값들을 떨고 앉았네 싶었다.
나와 썸녀는 히노쇼군에서 나와서 2차로 생맥주 집에 갔고 3차로 해산물 실내포차에 갔다.그래서 우린 꽤나취했버렸다. 맥주와 해산물을 잔뜩 먹어서인지 날씨가 쌀쌀해서인지 한기가 느껴지던 차에 우린 어묵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포장마차 앞을 지났다.
"오빠야. 오빠야. 우리 오뎅 먹자.오뎅."
"이야뜨끈뜨끈 하겠네. 그래. 먹자 먹자."
우린 주황색 천막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모 이거 그냥 바로 먹어도 돼요?"
"어, 거기 작대기에 파란 테이프 붙은 거는 500원 빨간 테이프는 800원 딴사람거랑 안 섞이게 잘 모아 놔라. 간장은 요있네."
난 종지에 간장을 담고 국자로 종이컵에 어묵 국물을 떠 담아 썸녀에게 건넸다.
"어 뜨겁다. 자. 조심. 조심."
"캬아. 오빠야 국물 쥑인다. 먹어 봐라."
술이 취하면 왜 그리 허기가 지는지 어묵이 너무 맛있었다. 어묵을 호호 불어가며 먹는데 포장마차 안쪽테이블에 낯익은 두 남자가 보였다.
히노쇼군 판도라 남자 애들이었다!
여자 애들은없었다. 아무래도 이미 택시를 타고 도망을 간 모양이었다. 난 너무웃겨서 그들에게 귀를 쫑긋 세웠다.
"야, 문자 보낸 거 답장 오나? 몇 명한테 보냈는데?"
"다섯 명한테 보냈는데 답장이 하나도 없네."
"뭐라고 보냈는데."
"너는 지금 뭐 해? 자니?밖이야? 이렇게."
"어떻게 해볼까란 뜻은 아니야 그냥 심심해서 그래 아니 외로워서 그래 까지, 다 쓰지 왜. 내가 여자래도. 외로워 죽을 거 같아도. 차마 니한테는 답장 안 하겠다. 새끼야. 그래서 둘이 우동에 소주 마시니까 좋냐?"
"아니. 택시 타고 다짜고짜 집에 가는 걸 내가 우짜는데 도로에 들누울까?"
"시끄럽다. 술이나 따라라. 무슨 손발이 맞아야지 아이고."
"어? 야, 저기 두 명 지나가는데 내가 한 번 갔다 올까?"
"어디? 어디!"
"뻥이다. 이 새끼야."
나는 가서 등이라도 토닥거려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무 낙담하지 마라.너랑 오래 보고 싶어서 간 거다. 내가 똥 싸면서 다 들었다.새끼들아."
난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이모 우리 이거 먹은 거랑 저기 저 테이블까지 같이 계산해 주세요."
"어디? 저기 남자 둘이? 삼촌 아는 애들이가?"
"아, 그냥요."
난 계산을 다하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죄송한데 딴 게 아니고 내 친동생이 군대에 있거든요. 내 동생 같고 오늘 술 먹어서 기분도 좋고 해서 내가 소주 한 잔 사고 싶어서 드시는 거 이거 내가 계산했거든요. 딴 거 아니고 진짜 나라 지키는 내 동생 생각나서 그런 거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그냥 먹지요."
"아? 진짜요! 이거 우동하고소주 값 대신 계산해 줬다고요? 대박이다!"
"네. 얼마 안 해요."
"마, 새끼야 형님한테 고맙습니다. 인사해라."
둘은 벌떡 일어나 내게 고맙다고 하면서 소주잔을 줬다. 난 웃으면서 한잔 마시고 썸녀와 포장마차에서 나왔다.
"오빠야. 누나 밖에 없다고 안 그랬나?"
"어, 맞다. 그냥 쟤들 보니까 옛날 친구들 생각나서"
"돈이 썩었나. 차라리 내를 도. 내를. 뭐 하는 짓이고.누가 여자 친구될지 몰라도 그 여자 친구 속에 천불 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