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뺑그이 Mar 02. 2023

글쓰기 숙제

1992년 따스했던 4월 어느 날.


6학 년 9반 교실에선 국어 시간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국어는 말하기. 듣기. 쓰기로 어 있었는데 그땐 쓰기 수업이었다. 쓰기 시간은 숙제로 써 온 것을 주로 발표하는 형태로 수업이 진행됐다.


난 하여튼 어릴 때부터 잔머리를 어지간히도 굴리는 아이였다. 그날이 13일이라 13번이었던 난 쓰기 숙제를 쉬는 시간에 급하게 했다. 이유는 벌서기 싫어서 회초리 맞기 싫어서였다. 전혀 자발적이지 않았으며 글쓰기 자체에 흥미가 없었다. 그날이 13일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걸리지 않길 두 손 모아 기도하면서 숙제를 안 했을지도 모른다.


주제는 '나의 친구'였던 걸로 기억한다.


바로 다음 수업이니 난  급하게 뭘 쓸까 뭘 쓸까 하다가 그냥 쉬는 시간에 오고 갔던 대화 그대로를 적어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쓰기 시간에 담임은 달력에 날짜를 보더니 평소대로 13일이라 13번인 나부터 발표를 시켰다. 내가 쓰기 책을 펴일어나읽을 준비를 하자.


"오오오오오"


내가 숙제를 했단 자체에 아이들은 놀랍단 소리를 냈다. 조금 붉어진 얼굴로 목을 가다듬고 읽기 시작했다.


"제목. 내 친구 재성이."


내가 제목을 말하자. 애들은 깔깔거리며 일제히 재성이 쪽을 봤고 재성이는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애들의 시선을 외면하느라 고개를 조금 숙였다.  다시 읽었다.


"재성이가 내게 물었다.  뺑그이 니 오늘 쓰기 숙제했나? 아니 안했는데. 나도 안 했다. 근데 나는 지금 하있는데. 왜 같이 하지 말자. 오늘 13일이다. 멸치가 아마 13일이라고 분명히 13번부터 시킬 걸 그래서 지금 숙제하고 있다."

 

애들이 담임 눈치를 보면서 막 웃기 시작했다. 멸치는 담임 별명이었기 때문이다. 난 웃음소리에 오디오가 겹칠 것을 우려해 한 템포 쉬었다가 다시 읽어나갔다.


"지금이라도 빨리 해라 멸치 요새 기분 안 좋아 보이던데. 맞지 네가 봐도 그렇지? 응. 멸치 요새 집에서 맨날 부부싸움 하나 예전에는 그냥 넘어가던 것도 요새는 안 봐주더라. 그러니까 오토바이 타기 자세로 벌서기 싫으면 숙제해라 저번에 오토바이 벌 서고 다리에 알 배겨서 계단도 제대로 못 내려갔다."


애들은 이제 대놓고 웃기 시작했다. 난 담임에게 맞아 죽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담임을 힐끗 보았다. 담임은 벽에 손을 짚은 채 뒤돌아 서서 창밖 운동장 쪽을 보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담임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난 안심이다 싶어 조금 편해진 마음으로 다시 발표를 이어갔다.


"재성이가 다시 말했다.  걸리면 숙제 다 했는데 공책이랑 교과서 깜빡하고 집에 두고 왔다고 할까? 야이 바보야 저 번에 기억 안 나나 내 그래 말했다가 멸치가 진짜로 숙제한 거 가지고 오라고 점심시간에  집으로 보내었다 집까지 졸라 뛰어가서 동아전과 보고 답만  베끼고 겨우 다시 뛰어서 학교 왔는데 멸치가 교무실에 내 불러서 뭐랬는지 아나? 뭐랬는데? '숙제 안 하고 혼나고 한 대 맞는 건 잠시되지만 거짓말을 하면 이렇게 고생하고 마음을 졸이게 되는 거야 알겠어?' 이렇게 말했었다 멸치 니 숙제 안 하고 뻥치면  바로 눈치 다 깔 걸 멸치가 그냥 멸치가 아니라 도사멸치다 괜히 거짓말했다가 개고생 하지 말고 그냥 빨리 숙제해라. 에이 몰라 걸리면 그냥 맞을 거다 어차피 쉬는 시간도 다 끝나 간다. 니 알아서 해라 난 숙제마저 다해야 된다 니 자리 가라."


애들은 여전히 웃고 있었고 담임은 어느새 돌아 서서 뭐 저런 게 다 있나 하는 눈으로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대목을 마저 읽었다.


"내 친구 재성이는 밥을 많이 먹습니다. 그래서 힘도 세서 씨름도 잘하고 스컹크처럼 방귀도 잘 뀝니다. 재성이는 친구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착한 친구인데 숙제만 잘해오면 더 훌륭한 학생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숙제는 니 알아서 라고 했는데 과연 재성이가 자기 자리로 돌아 가서 숙제를 했을아닐지 저도 궁금합니다. 그래서 다음 발표자로 고재성을 추천합니다."


애들이 웃으면서 재성이 쪽을 보았다. 재성이는 부릅뜬 눈빛으로 나를 노려 보았고 난 못 본 척했다.


"하하하. 뺑그이는 자리에 앉고 재성 너 일어나서 발표해 봐. 하하하."


담임이 웃으며 말했다. 고재성 한숨을 푹 쉬더니 일어나서 책을 읽을 준비를 했다.


"오오오오오"


당연히 숙제를 안 했을 거라 생각해 골탕 먹이려고 했는데 반전이었다.


"음... 음..."


재성이가 목을 가다듬었다.


"제목. 내 친구 뺑그이."


애들이 와아아아 박수를 쳤다.


"내 친구 뺑그이는 야비하게 친구나 팔아먹는 놈이다. 나는 수업종이 울리면 뺑그이의 아구지를 때릴 것이다.  기다려라. 내가 간다."


담임과 애들이 교실이 떠나가라 웃었고 고재성 결국 엉덩이 3대를 맞고 수업시간 내내 신나게 오토바이를 탔다.


그날 이후로 쓰기 수업시간 마지막 발표자는 자동으로 내가 되었다.


"자, 다 발표했으면 이제 마지막으로 뺑그이가 일어나서 발표해 볼까?"


담임이 말하면 애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내 발표에 귀를 기울였다.


"넌 참 글을 재밌게 쓰는구나."


국민학교를 6년이나 다니면서 선생님에게 혼나기만 한 내가 처음으로 선생님에게 들었던 칭찬이었다.


 창작의 고통에 시달렸다. 일주일에 한 시간인 쓰기 시간 발표에 반 아이들의 기대치가 커진 만큼 실망감을 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전 읽지도 않던 책장에 책을 뒤적였다. 이솝우화는 유치했고 탈무드가 그중 소재로 쓰기가 좋았다. '유우머 백과사전'이라고 적힌 유머책은 6학 년인 내가 읽어도 더럽게 재미가 없었다.


소재를 찾기 위해 태어나 처음 나 스스로 서점에 갔다. 돈은 어차피 없었으니 책을 사는 척 몰래 최불암 시리즈를 읽고 만득이 시리즈를 읽었다. 근데 다 너무 유치했다. 그래서 집에 있는 것과 다른 탈무드 시리즈 책을 한참 읽다가 서점에서 쫓겨났다.


시장을 걷다가도 상인과 손님의 대화를 유심히 들었고 엄마 아빠의 다툼도 유심히 들었다. 여자 애들이 고무줄 놀이하는 것도 친구들이 흙먼지 일으키며 축구하는 것들도 유심히 보고 들으며 늘 글쓰기 소재거리를 찾았던 글쓰기 숙제에 공을 들인 1년을 보냈다. 


성적표를 받았는데 가정통신란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 밝고 명랑하여 교우관계가 좋으나 학습 의욕이 부족함. 글쓰기와 미술에 흥미가 있고 작가 소질이 있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내가 지금 어쭙잖은 글로 브런치라는 바다에서 깔짝거리며 춤추고 있는 것은 어쩌면 1992년 6학 년 9반 교실에서 들었던 멸치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 때문은 아닐까.


예쁘다고 해야겠다. 잘생겼다고 해야겠다. 멋있다고 재미있다고 넌 성격이 좋다고 사람을 참 기분 좋게 한다고 해야겠다.  


그들 모두 어디서 흥겹게 춤추다 보면 정말 그리 될지도 모를 일이니.


작가의 이전글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