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에서 수속을 마친 건 출국 두 시간 전이었어. 모든 것을 잘 마친 사람의 평온한 마음으로 의자에 털썩 앉아있었지. 그때 해외여행을 여러 번 다닌 토갱이(친구)가 옆에서 유심을 설정하는 거야. 음... 근데 내 유심은 어딨지? 왜 갑자기 거실 서랍 위에 놓여있는 내 유심이 보이는 것 같을까. 가방에 안 넣었던가.
가방에 안 넣었어.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중요한 유심을 집에 두고 온 거야. 순간 너무나 허탈해져서 나를 호되게 질책했어. 유심을 알아본 몇 시간과 유심을 구매하는 데에 든 비용 빼고는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더라. 그저 멍... 이럴 수가 있나 싶어서.
몰랐던 이를 알아가듯, 사람을 한 꺼풀씩 알아가다 어느 날은 풀썩 서운해지는 것처럼 나는 여행의 진짜 얼굴을 보는 것 같아서 뜨악했어. 당신에게 이런 표정도 있었군요. 당신과 함께하다 이런 순간도 있을 수 있군요. 여행이 사람이라면 말이야, 유심이 가방에 없다는 걸 아는 순간 우리 사이는 가까워지려다가 조금 서먹해지고 말았어. 내가 너와 잘 지낼 수 있을까.
사실 여행이 아니라 내 문제지. 이런 나와 여행을 잘 마칠 수 있을까? 유심도 까먹는데?
비행기 안에서 일기를 쓰다가 잠깐 다른 일을 했는데 그 사이에 펜을 잃어버렸어. 어쩌자고 펜을 하나밖에 안 가져온 건가 생각하다 잠들었나 봐. 혹시나 해서 옆 자리 토갱이한테 펜 본 적 있냐고 물었는데 아까 승무원 분이 모나미펜 주인을 찾으셨다고 하는 거야. 모나미펜 그거 내 거거든!
승무원 분께서 내 옆을 지나가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씀드렸어. 잠시 뒤에 펜을 가져다주셨어! 한 손으로 펜을 쑥 내미시길래 깜짝 선물을 받는 마음으로 그분을 올려다봤어. 마스크 위로 생긋 웃는 눈이 보이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냉랭하던 여행길에 따뜻한 눈빛을 마주쳐서였을까. 마음이 울렁거려서 왈칵 눈물이 날 뻔했어.
여행은 이런 걸지도 몰라. 뜻대로 안 되는 순간 중에도 뜻밖에 동아줄을 발견하는 것. 아주 어릴 때 이후로 오랜만에 비행기를 타서 우왕좌왕 여행을 시작하고 있어. 그런 내 옆에 아무렇지 않게 웃어주는 직업인들과, 나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신경써주는 토갱이가 있어서 다행이야. 특히 토갱이한테 너무 고마워.토갱이가 아니라면 집에 두고 온 유심의 색과 크기, 놓여있는 위치와 그 친구가 거기에 그대로 있던 기간을 떠올리느라 비행기 타는 걸 잊었을 수도 있어.
*여행 초반 며칠은 오랜 친구 토갱이(별칭)와 함께했다*
뜻대로 안 되더라도 눈 감지 않을게. 오히려 더 크게 눈을 뜨고 동아줄을 찾아볼게. 처음 하는 일을 의연하게 하려고 하니까 더 괴롭고 답답해져. 모르면 모르는 대로 주변에 기대고 현지에 계신 분들께 손 내미는 게 좋겠어. 작아지려고 하면 크게 한 걸음 걸어버리면서 불안과 두려움을 조절하고 낯선 세상을 반갑게 맞이해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