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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규 Feb 22. 2024

[PRESS] 당신의 이야기, 그리고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책을 읽으면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항상 고민한다. 보통 주의깊게 읽는 책들은 세 번을 읽는데 첫 번째는 아무런 배경지식이나 분석 없이 편하게 읽고, 두 번째는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면서 다시 읽고, 마지막으로는 중요한 부분을 중심으로 이해하거나 특정한 부분들을 연결해가면서 읽는다. 그렇게 세 번 정도 글자가 눈에 익고 나면 나에게도 조금씩은 보탤 말들이 생각난다.


보통 나는 작가의 말과 작가소개, 목차, 책을 소개하는 말 등을 먼저 읽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 책의 작가소개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황시운, 2011년 ‘제4회 창비장편소설상’을 받으며 날아올랐으나, 같은 해 봄, 달이 밝던 밤에 추락 사고를 당하며 날개가 꺾였다. 그날의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었고 끔찍한 통증 속에 남겨졌지만 느리게 읽고 쓰며 살아 있음을 증명하려 애쓰고 있다.


조금은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떤 관점으로 책을 읽어야 할까 고민하는 것은 그리 낯선 일은 아니지만 이야기를 읽고 글까지 남겨야 하는 입장에서, 비록 그럴 의도가 없고 선의에 가깝더라도 나도 모르게 장애인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내가 사용하는 표현 속에 배제와 혐오의 표현이 섞여있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책 속의 여러 사례들이 그렇고 우리가 익히 공부해왔고 현실에서 겪어왔듯 말이다.





장애인은 나이와 성별을 막론하고 무언가를 시도하는 자체로 신기하거나 기특하고 대견스러운 존재로 인식되곤 한다. 그 말은 독립적으로는 무엇도 할 수 없는 존재로 퉁쳐지고 있다는 뜻도 된다. p.60






어쩌면 낯이 익은 얼굴인 내게 호감을 표현하기 위해 망설임 끝에 용기를 내서 건넨 말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내 기분을 상하게 한 그 말은, 장애인의 보호자가 다른 장애인에게 충분한 선의를 가지고 한 말일 가능성이 높았다. p.61




그런데 그런 조심스러움 속에서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던 것은 분명 내가 알리없는 그 고통들에 자꾸만 나의 고통들을 대입해서 읽는 나의 모습이었다. 

불쑥불쑥 끈질기게 찾아오는 통증의 묘사가 내가 나를 오래 앓게 만들었던 고민과 아픔들에서 느꼈던 것과 유사하다고 느꼈고, 저자의 좌절이 언제인가 나를 주저앉혔던 좌절처럼 보였으며, 배제와 소외의 경험들이 나의 어느 시절처럼 읽혔다.


저울에 달아보면 그보다는 훨씬 가벼울 나의 고민과 고통들을 그에 빗대 이해하고 보편화시켜 적용해 나가는 일이 죄송스럽게 느껴지면서도 그게 아마 작가도 원하는 길이라고, 책이 장애인의 현실을 고발하는 수단으로 쓰이면서 동시에 다른 책들과 같은 독법으로도 읽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 번거로움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굳이 만날 필요 없지 않을까? 너를 정말로 아끼는 사람들은 언제든 네가 있는 곳까지 와서 너와 함께 턱을 넘을 준비가 되어있을 거야.”




친구의 말은 정말이지 큰 위로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좀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어째서 나를 아끼는 사람들은 항상 나와 함께 턱을 넘어야만 하는 것일까. 나도 그들도 턱을 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면 안 되는 것일까. ...중략... 휠체어 사용자들에게 열린 세상은 휠체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활짝 열린 세상일테니, 결국 내가 바라는 세상은 모두를 위한 세상일 테다. p.84




우리는 책을 읽으며 저자가 장애인으로써 경험해야 했던 특수한 체험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겠지만,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와 변화해야할 사회의 모습도 봐야할 것이고, 다른 문학작품과 산문에서 그렇듯 나의 삶을 대입해보고 보편화된 인식도 얻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장애인인 작가가 썼으니까 장애인의 이야기로만 보고 싶지는 않다는 뜻이다.


장애인 작가가 썼다는 점에만 매몰되지 않고 다른 산문들과도 동등한 위치에서 책을 이해할 때 이 책도 더욱 가치 있는 것이 되리라 믿는다. 그러니 이 책을 읽는다면 하반신이 마비된 중도장애인의 삶, 그리고 여전히 변화되어야할 인식과 사회에 대한 고발로도 읽어야겠지만, 자유롭게 상상하며 더 많은 것을 얻어가시길 감히 권해본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삶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삶을 고찰하는 것이 결국 문학과 산문의 공통된 역할이자 힘 중 하나니까.





내게 소설은 생존의 다른 이름이었다. 살아남은 내가 할 수 있는게 글쓰기뿐이어서, 그것마저 하지 않는다면 내 존재를 나 자신에게조차 설명할 길이 없어서 소설을 썼다. 아니, 쓸 수밖에 없었다. ...중략... 어느 날 세상이 내게 손을 내밀어주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책이 만들어졌다. 사고가 난 지 꼭 십 년째 되던 해였다. p.165






사고 이후, 내게 글은 새로이 갖게 된 정체성인 장애로 인해 겪어야 하는 온갖 불합리를 낱낱이 꺼내놓을 수 있는 도구가 되어주었다. 그전까지는 소설이 세상을 관찰하는 눈이었다면, 이제 내게 소설은 세상에 ‘우리’를 알리는 입이 된 것이다. 




 이런 변화가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에 와서는 옳고 그름이 그다지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똥을 싸서 뭉개고 앉은 채 그로 인한 수치심과 분노로 절망하는 나를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 유쾌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나이기 때문에,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인 것을 글로 써서 알려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누구에게나 그런 일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쓰는 일이든, 그리는 일이든, 달리는 일이든 간에 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그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내야만 하는 그런 일이. p.187 




이야기는 총 4부로 진행된다. 

1부 ‘어쨌든 다시 봄’에는 사고 이후 하반신 완전마비 판정을 받고 흉수 손상의 후유증으로 신경병증성 통증을 앓게 되면서, 사고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낯선 세상에서 ‘신생아’처럼 새롭게 태어나 겪게 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2부 ‘그간에 밀린 이야기들’에서는 작가가 사랑하는 조카 1, 2, 3호를 비롯한 가족 이야기와 ‘제2의 고향’인 탄광 마을 이야기 등이 펼쳐진다. 

3부 ‘움직여라, 발가락’에서는 아무것도 되고 싶은 것이 없던 사람에서 어느 날 갑자기 ‘마녀’가 되겠다고 선언하고 ‘쓰는 사람’의 길을 걷게 된 날부터 지금까지, 소설가 황시운으로서의 자아가 짙게 녹아나는 글들이 펼쳐진다. 

4부 ‘다시 시작할 산책’에서는 사랑, 다이어트, 여행 등 잔잔한 일상 이야기들에 이어 다시 시작할 ‘산책’에 대한 기대감으로 책을 마무리 짓는다. 

++ 

자주 읽기를 멈췄다. 반복되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통증과 싸우며 필사적으로 글을 쓰는 소설가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부러진 세상을 향한 작가의 부러지지 않은 펜에서 나는 ‘존재에의 용기’를 본다. 그것은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존재하고 또 세계의 일부로 참여하려는 용기이므로 숭고하다. ‘소설은 생존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고백에서 나는 무엇보다 삶이 중요하다는 역설의 목소리를 듣는다. 세상 곳곳에 포진한 수많은 턱들 앞에서 자주 좌절하고 분노하지만 결국엔 극복하면서, 삶을 긍정하게 하는 신호들이 넘쳐나는 글을 써줘서 고맙다. ‘세상을 관찰하는 눈’만이 아니라 ‘세상에 우리를 알리는 입’이기를 선택한 작가를 마음을 다해 응원한다. 움직여라, 시운! 더 쓰고 계속 쓰고 끝까지 써라! - 이승우(소설가)   


아트인사이트 전문: https://www.artinsight.co.kr/news/search.php?q=김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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