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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규 Feb 22. 2024

[에세이] 계절은 시간을 흐르게 하니까






계절이 바뀌어서야 비로소 시간이 흘러갔음을 자각한다.


한 시절이 지나갔음을 실감한다




바닥에 누워있다가 쌀쌀한 기운에 옷을 챙겨입었다. 집 밖을 나오자 옷차림이 바뀌고 거리의 풍경도 바뀌기 시작해 실감이 좀 났다. 가을이다. 반바지를 고집하고 아이스크림을 사먹어도, 여름을 같이 보낸 에어컨과 선풍기를 아직 창고에 들여놓지 않았어도 변하지 않는 사실. 시간이 흐른다는 것.


가만히 멈춰있는 것만 같다가도 별 수 없이 시간의 흐름을 자각하게 만드는 순간들이 있다. 한동안 다니던 학원 수업의 종강, 어느새 발급받은 자격증, 얼마 남지 않은 스터디카페의 잔여시간, 현실이 되어버린 포스터 속 공연날짜, 기다려도 전화가 오지 않는 핸드폰 같은 것들이 그렇다.


자꾸만 떠올리는 과거에서는 이제 벗어날 때도 되었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는데. 영영 멈춰있을 것만 같던 그 시절에서 지나와 또 다른 새싹을 피워낼 준비를 해야 된다는 듯이 거리에도 떨어진 낙엽들이 굴러다니기 시작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일상의 종말과 여전히 계속되는 일상에 대해 생각하다 소설 속 이야기를 찾아다니고, 달리고 나서 먹는 맥주 한 캔과 위스키는 왜 숙취도 없는지 하루를 보내고 집에 들어오는 길이면 자꾸만 생각이 난다. 어느 날은 단백질쉐이크와 크레아틴을 입에 털어넣고 또 다른 날은 위스키와 하이볼을 마시는 그저 그런 일상.


오랫동안 기다렸던 연락은 생각과는 한참 다른 모습으로 싱겁게 현실이 되어 허탈하게 했고, 더 이상 전화를 걸 수 없는 전화번호와 간간히 올라오는 블로그와 인스타그램 속 근황을 바라보다 자주 일기를 쓴다.


자격증이 나를 전부 증명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기저기 시험을 보러가고 연수를 들으러 다니기도 한다. 돈 되는 일을 하지 않고 자꾸만 유예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정당화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지만 스스로에게 어리광을 부려본다. 이 정도는 괜찮다면서.  


그런데 갑작스레 날씨가 서늘해지자 한편으로는 계절이 실감하게 한 시간감각이 자꾸만 마음을 조급하게 하나보다. 

뭐라도 해야하는데 싶은 생각들이 자꾸만 마음을 괴롭게 한다. 계절이 바뀌면 별 수 없이 시간도 흐르는지 얼마 전까지는 자꾸만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 했었는데 이자라도 붙은 듯 빠르게 시간이 흘러 갑자기 혼자만 덩그러니 미래에 옮겨진 것 같다.


조만간 돈을 벌기 시작할 것이다.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사람들을 자꾸 만나기도 할 생각이다. 그럼 분명 나름의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내 일상에도 금이 가겠지. 지금이라고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나름의 균형과 안온함을 유지하고 있던 날들로부터 떠나야 할 것이다. 아기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이, 성체가 되어 익숙한 보금자리를 떠나가듯이. 계절이 변했으니까.


그리고 추위를 피해 남쪽으로 날아가는 철새처럼 다가오는 불안과 불만족을 피해 조금이나마 더 나아보이는 하루를 찾아갈 것이다. 그곳에 기다리는 것이 어떤 계절일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분명 오늘 여기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하지만 어쩌면 그냥 생각하기에 달린 건지도 모르겠다. 

김연수 작가는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의 작가의 말에서 “가을이 되면 가을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고 싶다. 여기에 단순한 기쁨이 있다. 물론 겨울과 봄과 여름에도 단순한 기쁨은 있다.”고 썼다. 만족스럽지 않고 때로는 고통스러울지라도 지금 이 순간의 세상을 품에 안아야 한다면서.


계절은 간절히 원하든 원치 않든 결국 온다. 더위를 달래주던 선풍기는 결국 창고에 넣어야하고 아이스크림을 먹더라도 입는 옷은 달라져야 한다. 그 사실이 유달리 서글프게 느껴지는 날도 있지만 시간은 자꾸만 흐르는 법. 나도 지금의 계절이 가장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싶다.


후드티와 롱패딩을 입고도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고 천천히 녹여먹으면서 앞으로 나아가야지. 달디 단 아이스크림에서 왠지 쌉쌀한 맛이 감돈다. 


아트인사이트 전문: https://www.artinsight.co.kr/news/search.php?q=김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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