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을 보면서 내내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는구나.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시간은 자꾸만 흐르고 우리는 분기점에서 선택하기를 강요받는다. 그러나 인생에서 그 선택이란 언제나 내가 생각한대로만 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이번 뮤지컬 <겨울나그네>에서 주인공 역의 민우가 그렇다. 바르고 성실하게 자라온 청년, 의대에 진학할 정도로 공부도 잘 했으며,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줄도 알고, 우연히 찾아온 사랑에 설레하고 풋풋하게 마음을 전하던 민우가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변해가는 과정은 이러한 삶의 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장래가 촉망한 민우는 우연한 계기로 성악과 출신 다혜와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키워가지만, 아버지의 사업은 기울어가고 설상가상으로 건강까지 악화되어 병원신세를 지게 된다. 아버지가 쓰러져계신 병실까지 찾아와 빚을 독촉하는 빚쟁이들에게서 아버지를 지키려다 결국 민우는 폭력을 행사하게 되고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꼬여만 가게 되는데.
그의 어머니는 사실 술집여자였다는 것이 밝혀지고 유일한 가족인 아버지의 건강과 사업은 악화되며 범죄자라는 낙인까지 찍혀버린 삶. 아버지의 죽음 이후 딛고 설 구석이 없어 자신의 핏줄-어머니의 가족이자 뒷세계에서 클럽을 운영하는 로라킴-을 찾아가면서 그에게는 또 다른 삶이 펼쳐진다. 민우는 클럽 나이아가라에서 위험하고 불법적인 일들에 휘말리고, 클럽 댄서인 ‘제니’와 사랑의 연이 이어지면서도 그는 평생을 첫사랑 다혜를 그리워하며 산다.
어린 시절부터 그를 친동생처럼 챙겨주던 현태는 다혜를 도와 민우를 찾아나서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다혜에게 마음을 두게 된다. 민우는 제니와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면서도 다혜를 평생 그리워하고, 제니는 그런 민우를 바라보며 불안감과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다. 다혜는 제니와 아이를 낳고 사는 민우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고, 결국 그동안 항상 곁을 지켜줬던 현태와 결혼한다. 그 소식을 들은 민우는 지난 삶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고 새로운 꿈을 꾼다. 그러나 이제 마음을 잡고 뒷세계에서 마지막으로 큰 돈을 번 후 제니와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던 민우는 일이 꼬여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아주 보편적인 서사는 아니겠으나 삶에는 그런 면도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만을 하며 살아왔는데 어느새 막다른 길에 도착해버린 그런 삶도 있다는 것 말이다. 민우의 선택이 극으로써 개연성을 가지고, 인간적으로써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물론 그것이 필연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분명 더 나은 선택도 있었으리라 믿는다. 최악의 상황이라고 모두가 나쁜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고, 사실은 다른 길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 믿고싶다.
그러나 강요되는 상황에서 특정한 선택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삶이란. 그걸 보는 이들에게 씁쓸한 입맛을 남긴다. 실제로 그는 극 전반에서 좋은 사람으로 비춰진다. 사건들에 휘말리기 이전인 초반부에는 물론이고 뒷세계로 흘러들어갔을 때조차 말이다. 불법적인 일이나 그 생활에 쉽게 손대려하지 않고, 댄서인 제니에게 이곳에 평생 있을 생각이 아니면 술과 약을 멀리하라고 말라고 조언하고, 안타깝게 헤어져야 했던 다혜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끝이 안타까운 것은 민우에게 죽음이 찾아오는 시점이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던 때라는 점이다. 주어진 운명과 자신의 선택을 평생 부정하고 자신의 있을 곳을 찾지 못해 떠돌던 그가, 사랑했던 다혜와 친형같던 현태의 결혼 이후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때. 그것도 완전히 변질되어 뒷세계의 왕이 되겠다는 꿈이 아니라, 여전히 그러한 일을 불가피한 수단으로만 남겨둔 채 마지막으로 새 삶을 위한 거래를 진행하던 그 날 그는 죽는다.
민우는 어떤 잘못으로 그러한 삶을 살아야만 했나. 가족도 없고 이제는 그를 위해 슬퍼해줄 다혜도 없는데, 다혜와 현태는 민우를 잊고 가정을 이뤄 새로운 삶을 살겠지. 아니, 사실은 그조차도 모르는 것이다. 민우의 존재가 평생에 걸쳐 그 둘에 관계에 어떤 상처를 입힐지. 꺼내려해도 절대 꺼내지지 않는 신발 속 작은 돌멩이처럼 삶을 걸어가는 동안 순간순간 그 기억은 둘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꾸만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혼자 남은 제니는 어쩌란 말인가. 그녀 역시 클럽 나이아가라에 흘러 들어올정도로 기구한 삶을 살았을 텐데. 그녀의 삶의 보상은 언제 받을 수 있는 걸까.
이렇듯 엇갈려가는 네 사람의 사랑과 삶. 이제는 다소 진부하고 클리셰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겨울나그네가 최인호 작가의 소설로 1884년 동아일보에서 연재되었고 1986년 영화화, 1989년 드라마화, 1997년 예술의전당 개관 10주년 기념 뮤지컬로 공연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오히려 이것은 클리셰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그 원형적인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이미 오랜 시간동안 작품성과 대중성을 입증해온 이야기가 현대의 뮤지컬 배우와 연출기술을 만나 어떻게 표현되는지 바라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뮤지컬의 매력은 ‘낭비’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큰 무대에서 펼쳐지는 압도적인 규모의 공연 현장에서 느껴지는 감각. 모든 장면을 한 눈에 다 담을 수 없겠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 시선이 집중될법한 주연배우에만 신경 쓴 것이 아니라 무대 곳곳 어디를 돌아봐도 찾을 수 있는 풍성한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와 춤과 노래들. 마치 다 먹을수 없을만큼 가득 차려놓은 밥상 앞에서 맛있는 음식을 입안 가득 크게 베어물고 느끼는 풍성함과 만족감이랄까. 우리가 자꾸만 뮤지컬을 찾게 되는 이유다.
최인호 작가의 10주기를 맞아 새롭게 재창조된 이번 뮤지컬은 현재 한전아트센터에서 공연중이다. 주차장도 넓고 규모가 꽤 큰 공연장이라 큰 불편없이 공연을 즐길 수 있다. <젊은 나그네>는 이창섭, 인성(SF9), M(아스트로), 렌, 세븐, 려욱(슈퍼주니어), 진진(아스트로), 한재아, 임예진, 민선예, 여은 등 다양하고 젊은 캐스팅으로 이루어져있다. 지난 2023년 12월 15일에 시작된 뮤지컬은 2024년 2월 25일까지 공연될 예정이다.
따뜻하고 아련한 사랑 이야기와 강요된 상황에서 내몰린 선택을 해야만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려지는 삶의 진실들. 다소 익숙하지만 깊고 진한 향과 씁쓸한 맛을 남기는 이야기다.
잃어버린 순수,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
모두에게 찬란했던 우리 젊은 날의 초상
전 세대를 뛰어넘는 진한 감동을 선사할 뮤지컬, 겨울나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