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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 Jan 24. 2018

철산교

지금은 IT 업체와 높은 빌딩이 가득한 구로디지털단지와 가산디지털단지는 과거 "구로공단"과 "가리봉"이라고 불렸다. 한국 경제가 농업에서 공업으로 변화하고 수출을 위한 슬리퍼와 담배 필터, 기계 부품 등 지금은 중국 공장에서 제작되고 있던 이런 물건들이 한때는 이곳에서 젊은 청춘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져 배를 타고 다른 나라로 팔려갔다.


구로공단과 가리봉을 연결하던 가리봉오거리로 불리던 지역은 지금 "가산 오거리"로 명칭이 바뀌었고, 그 젊은 청춘들이 점심값을 아끼며 조금이라도 자신의 청춘을 기억하고자 방문했던 가리봉오거리의 수많은 다방과 식당들은 이제 한국에서 일하는 중국인들을 위한 양꼬치 식당과 비자 문제 해결을 위한 여행사들로 변화했다.


돈을 아끼고 아껴서 수줍게 책을 한권 마련하거나, 라디오를 듣는게 유일한 문화생활이였던 공장의 노동자들이 있던  이곳이 이제는 정장을 입은 직장인들과 쇼핑몰에 옷을 사러 들리는 젊은이들을 위한 거리로 변했다. 하지만 지하철과 도로를 연결하는 고가도로는 지금도 "수출의 다리"라고 불리고 있다.


"수출의 다리"를 지나 IC로 빠지는 도로가 나오면 정면에 안양천이 내려다 보이는데, 이곳에 경기도 광명과 구로공단을 연결하는 4차선 도로 "철산교"가 존재한다. "철산교"가 지어지기 전 이곳은 광명과 구로공단을 연결하는 몇 안 되는 다리였고, 버스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정도의 좁은 다리 위로 구로공단에 집을 구하지 못한 많은 근로자들이 광명에서 집을 얻어 출퇴근을 하고 있어 항상 다리는 마비 상태였다.


지금은 다큐멘터리에서 아프리카나 동남아 가난한 국가의 산골 마을에서나 보는 강을 사이에 두고 긴 줄로 땟목을 타고 건너는 모습도 이 당시에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늦은 시간 밤늦게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힘겹게 강을 건너는 구로공단의 여공들이 풀숲에 숨어있던 흉악한 범죄자들에게 성범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 당시 광명시 철산동은 자갈밭이 가득한 벌판이었고, 경찰 인력도 부족해서 안양 경찰서의 일부 직원들이 파견되어 근무하는 지서만 존재했다. 철산의 한 이장은 이런 범죄가 안타깝고 많은 사람들이 힘겹게 광명에서 구로공단으로 출퇴근을 한다는 사실에 다리 증축의 필요설을 실감했고, 돈 없는 시골 이장의 힘으로는 다리 건설을 추진할 수 없었다.


결국 철산교를 건설하면 구로공단과 광명을 이어줄 버스 회사들을 생각하며, 많은 버스 회사들에게 다리 건설을 위한 비용 지원을 요구했고, 대부분의 회사들이 거절했다. 하지만 설득 끝에 서울의 버스회사 "보영 운수 "와 "한성 운수 " 2개의 업체가 철산교 건설 비용을 지원했고, 철산교는 4차선 다리로 완공되어 젊은 공단의 근로자들의 안전한 출퇴근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고속도로로 빠지는 IC가 존재한다는 이유로 항상 출퇴근 시간에 막혀있는 속 터지는 그 "철산교"는 지방에서 올라온 꿈 많은 청춘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버스에서 잠이 들었던, 그리고 내 어머니가 고향에서 태어난 어린 조카들이 그리워 버스 창밖으로 안양천을 내려다보며눈물을 훔치던 다리다.


그리고 지금도 서울 버스 중 유일하게 철산교를 이용하여 순환하는 버스는 보영 운수와 한성 운수 2개의 업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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