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3만 보 걸어서 쇼핑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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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쇼핑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쇼핑은 선택이 아닌 필수일 때만 한다. 쇼핑 리스트를 작성해서 구매 목록 외에는 핫 딜, 2+1이라고 해도 쳐다도 보지 않는다. 심지어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른다. 해야 하지만 하기 싫은 일은 최대한 빨리 후다닥 해치우는 성격이라 그렇다. 그래서 쇼핑을 위해 미국에 온 팔두와 함께하는 여행은 쉽지 않았다.
이날 하루는 너에게는 '쇼핑 데이' 나에게는 '체력 단련'의 날이었지. 그놈의 ‘수프림 Supreme’. 팔두가 미국에 오기 전에 부탁했던 사항이다. 딱 한 번만 수프림 매장을 구경하고 싶다고. 수프림에 대한 너의 오랜 사랑을 십 년 넘게 지켜보았는데. 그래, 한 번쯤이야. 입장 줄이 길다고 해서 오픈 2시간 전에 도착했다. 쇼핑하겠다고 아침도 건너뛰고 일어나자마자 급하게 세수만 하고 말이다. 그런데 웬걸, 매장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싸늘하다. 팔두의 실망한 표정이 가슴에 꽂힌다. 하필 우리가 방문한 날이 나이키와 콜라보한 상품이 출시되는 날로 사전 등록한 고객만 입장이 가능했다.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애초에 없었다.
잔뜩 기대했다가 모든 희망을 다 잃은 사람처럼 낙담한 팔두의 표정. 그의 수프림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해 하루 종일 끌려 다녔다. 언제까지 쇼핑을 할 건가. 오늘 하루 너에게 맞추겠다 다짐은 했지만 쇼핑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진짜 하루 종일 쇼핑만 할 생각인가? 설마...
수프림에서 아이템 두 개 살 돈으로 LA 쇼핑 성지 ‘멜로즈 애비뉴 Melrose Avenue’를 싹 다 뒤져 신발부터 바지, 재킷, 후드티 등 머리부터 발끝까지 걸칠 수 있는 아이템을 왕창 쇼핑하셨다. 팔두 쇼핑 스타일이 마음에 드는 점은 사고자 하는 아이템을 결정하는 시간이 굉장히 짧다는 것. 이날 나는 매장 스캔 후 옷도 성심성의껏 골라주고 통역도 해주고 팔두의 훌륭한 퍼스널 쇼퍼였다. 그리고 진짜 이놈은 아침부터 밤까지 쇼핑만 했다. 오늘 3만 보를 걸었다. 약 2년간 세계여행을 하면서 가장 많이 걸었던 날이다. 내가 이렇게나 동생을 사랑하는데 동생 놈만 모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