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국을 떠났다.

캐나다 생존기_00

by Dandan한 B


8월 25일 한국을 떠났다.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10월. 캐나다에 도착한 지 한 달이 넘었다. 뭐부터 시작해야 할까.

일단 한국을 떠나 온 과정을 나열해 보자.


한국을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2월. 그리고 유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한 게 3월. 그리고 바로 4월에 휴직을 하고, 집을 내놨다. 집을 내놓고 단 일주일 만에 집이 나갔다. 사실 집이 안 나가면 못 가는 거지 뭐 하는 안일한 마음도 조금 있었는데, 절대 그럴 수 없게 돼버렸달까. 그리고 8월 1일 출국 표를 예매한 하고, 두 주 후에 집을 빼 레지던시로 거처를 옮겼다. 두 달도 채 되지 않는 사이에 어마어마한 결정을 해버린 셈이다.


무모하지만 용감했고, 무식했지만 덕분이었단 생각이 든다. 무모하고 무식했던 덕분에 용감하게 결정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레지던시로 이동하고 나서 아이의 학생비자를 신청했다. 선 비행기표 예약, 후 비자 신청이라니 남들이 들으면 놀라서 자빠질 일이지만 내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잘 준비해서 갈 만큼의 시간이 충분히 있을 거라 생각 때문이다. 사실 비자만 나오면 준비는 얼추 끝난 셈 아닌가. 비자를 신청할 때 유학원에서도 충분히 시간이 있다고 했다. 출국 전까지는 무조건 비자가 나올 테니 그것도 걱정하지 말랬다. 전문가의 말인 만큼 그들을 믿었고 걱정하지 않았다. 걱정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을 거니까.


출국을 결정하고 비자신청을 하기까지 우리는 계속 어느 지역에 머물 것인지 정보를 모았다. 그래봐야 온라인에 떠다니는 광고, 선입견, 경험담뿐이었지만 그것으로 대략의 분위기는 가늠할 수 있었다. 이왕이면 캐나다의 수도를 경험하고 싶었고, 오래된 부촌이었으면 했고, 도서관과 미술관 그리고 박물관이 많은 동네이길 바랐다. 마지막까지 네핀과 올드 오타와 두 지역을 두고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결국 올드 오타와 지역으로 결정했다. 물론 네핀 지역이 집값도 더 싸고, 그럼에도 집 컨디션도 훨씬 좋았지만 동네 전반의 생활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올드 오타와가 더 잘 맞을 것 같았다. 그렇게 집까지 계약.

휴직했고, 집 뺐고, 비행기표 예약했고, 비자신청했고, 집도 구했다.

그 사이 유학원에선 내게 영어공부를 하라고 했다. 학교와 교육청에서 전화가 올 테니 어느 정도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고, 7월에 영국문화원 주말반을 등록했다.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게 모두 필요했으므로 아이엘츠 반에 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중급부터 들어갈 수 있는 반이었고, 나는 분명히 테스트를 통과해서 이 자리에 있는 것임에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20살이나 어린 친구들의 도움으로 힘겹게 교실에 앉아있을 뿐, 오히려 그들에게 방해가 되는 게 아닌지 걱정될 정도였다. “나 진짜 큰일 났다.”가 속 마음. 하지만 영어 노출 환경에 떨어지면 어떻게든 하게 되겠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내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회사 안다니까 여유롭게 앉아서 공부할 시간이 주어지기만 하면 금방 늘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 정말 안일하기 짝이 없는 마음이었단 걸 알기까진 채 한 달도 안 걸렸지만.

그리고, 7월 중순이 지나도록 여전히 비자가 안 나왔다.


하필 지금 이때에 캐나다 총리가 바뀌었고, 이민국 직원이 대거 구조조정을 당했으며 이민정책이 바뀔 예정이라 모두 대기 상태라는?! 타이밍도 참 얄궂기도 하지. 매일매일 인터넷을 뒤지며 비자받은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고, 아침마다 캐나다 이민국 사이트에 접속해 비자 심사 상태를 확인했다. 하루하루 피가 마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오래 걸렸던 적은 없었다고 한다. 이러다 거절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찔했지만 전화로 문의할 수는 없다고 한다 다만 문의메일을 보낼 수 있다고 하는데, 자동화 시스템에 따른 확인 답변만 올뿐, 어떤 메일에도 회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지난한 나날이 지나고 결국 레지던시 계약 기간이 끝났다. 할 수 없이 15일을 연장하고, 비자가 나오길 기다렸다.

8월 1일부터 계약해 둔 캐나다의 집은 공실상태였고, 한국에서는 레지던시 비용을 내고 있었다. 거주 비용이 더블로 드는 셈. 설상가상 8월 1일 출국 예정이던 비행기표를 오픈티켓으로 전환하면서 수수료까지 내게 됐다. 오타와는 직항이 없어, 1회 경유를 해야 했고, 수수료가 항공편마다 붙는다. 즉 어지간한 취소 수수료의 2배를 냈다고 보면 된다.

술술 풀린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실은 다 엉망이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떠날 운명이라고 믿었는데, 착각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15일 안에만 비자가 나오면 다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10일이 되고 12일, 13일이 돼도 비자는 안 나왔다. 레지던시 연장도 더 이상은 불가능했다.

그때 마침, 인정 넘치는 회사 동료가 여름휴가차 동생집 방문을 위해 밴쿠버로 떠났고. 일주일 간 내게 집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그것도 무상으로! (아직 세상 살만 하다.!) 그렇게 동료의 집으로 들어가기로 한 15일이 됐고, 광복절을 맞아 비자가 나왔다. “대한민국 만세~”

급하게 출국 항공권을 알아봤지만, 표는 없었고, 또 너무 비쌌다. 거기다 캐나다에서 우리를 맞아줄 정착서비스 팀과도 일정을 맞춰야 했기에 우리는 23일에 출국하기로 했다. 그때까지는 어린이대공원 앞의 친구집에서 마지막 휴가를 즐기기로 했는데, 유치원에 가지 않는 어린이와 있기에 몹시 적합한 곳이었다. 놀이동산과 산책로, 맛있는 식당이 즐비한 최고의 입지! 덕분에 다시 긍정회로가 돌기 시작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고난이 있으면 또 즐거운 일도 있는 법이지.

그렇게 기다기고 기다리던 출국 날! 야무지게 짐을 사고, 친구 집 정리를 한 뒤, 소정의 감사의 표시도 잊지 않았다. 이제 진짜 준비 끝!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보니, 짐이 넘친다. 트렁크를 야무지게 정리하고 무게를 맞춰서 이리 빼고 저리 빼고 테트리스를 마친 끝에 공항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이의 비행기 티켓 발권이 되질 않는다.

항공사에선 아이의 여권을 바꾼 적이 있냐고 묻는다. 하지만 여권을 바꾼 후에, 바뀐 여권으로 비자 신청서를 보냈던 터라 바뀌지 않았다고 했다. 비자 신청을 대행해 준 유학원도 연락이 닿지 않았던 터라 할 수 있는 건 현장에서 ETA를 재신청하는 것뿐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유학원에서 처음에 전달한 구 여권으로 아이의 비자를 신청해서 오류가 났던 거였다. 체류기간이 길 거라 중간에 여권이 만료되면 변경하는 번거로움이 있으니, 만료일을 최대한 길게 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부랴부랴 사진을 다시 찍고 여권을 새로 받아서 학생비자를 신청했던 건데……. 앞서 정보 확인차 전달했던 여권으로 신청하신 거다. 그럴 거면 왜 바꾸라고 했을까. 학생비자 서류에 적혀있는 만료일과 여권 만료일과 동일하다는 걸 그쪽에선 알았을 텐데 왜 확인하지 않았을까. 등등…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목구멍으로 물 한 모금이 잘 안 넘어갈 정도였는데, 결국엔 나의 무지도 한 몫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비자 신청이 제대로 잘 신청됐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만료일이 동일한지 확인하는 것을 추천한다.

어쨌든, 항공사 측에서는 현장에서 ETA를 신청한 뒤 2시간 만에 메일을 받아서 떠난 분이 있으니 시도해 보라고 했다. 출국까지 3시간이 남았고, 나는 그 자리에서 ETA 신청을 했다. 항공사에선 비행기 출발 5분 전까지도 기다려 줄 테니 그때까지라도 나오면 핫라인으로 안내해 주겠다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그리곤 직접 캐나다 이민국에 전화해 언제쯤 비자를 받을 수 있는지 확인까지 해주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돌아온 답변은 “확인했으니 그냥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일련의 과정에서 경험한 대한항공사 직원분들의 친절과 도움에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그분들이 없었다면 정말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 비행기가 출발하기 5분 전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ETA는 나오지 않았고, 우리는 결국 그날 출국하지 못했다.

어둠이 내리기 시간 한 출국장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떠나지 못한 아쉬움에 아이도 나도 상심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는 없으니, 가장 빠른 다음 항공편을 예약하고 공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보통 eta는 72시간 내에 나오기 때문에 그 안에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 박스 2개에 32인치 트렁크 2개 기내용 캐리어 2개에 백팩까지 메고. 보통이라면 이 과정에서 엄청난 수수료가 발생했을 거다. 티켓값을 하나도 돌려받지 못하는 수준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우리가 항공권을 1차 재예매할 때 이미 일정이 촉박한 상태였기 때문에 비싼 항공권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항공권에는 변경수수료가 포함돼 있었다.


돌아갈 집이 없었던 우리는 이번엔 형님네 집으로 갔다. 사실 이번 출국은 형님네와 함께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나와 딸아이 둘만 출국하는 것에 대한 불안이 컸던 남편은 형님네 아이들이 함께 가는 것에 대해 제안했고 형님과 두 조카가 함께하기로 했다. 그래서 비자 신청이 제대로 됐던 형님과 아이들은 그대로 비행기를 탔고, 아이들이 떠나고 허전할 아주버님과 함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 이틀간 머물기로 한 것이다.

그날 저녁 아주버님이 사주시는 고기를 씹으며 마음속에 울화를 다스렸는데, 고기가 채 익기도 전에 ETA가 나왔다. 하, 2시간만 빨리 나오지. 불판에 지글지글 익고 있는 고기를 보고 있자니 모든 일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왠지 모를 공허함까지 느껴졌다. 그래도 뭘 어쩌겠나. 남은 이틀을 또 재밌게 보내야지.

그리고 대망의 25일 아침이 밝았다. 항공편은 저녁이었지만, 우리는 아침에 일찍 나서기로 했다. 혹시 모를 변수에 대비하기 위해서. 형님이 두고 간 짐 몇 가지를 추가하기 위해 싸둔 짐을 꺼내 다시 재편성하고, 긴 여정에 허기질 것을 대비해 간식까지 구비해 공항으로 떠났다. 이제야 항공권 발권이 된다. 진짜 출국이다.


밴쿠버를 경유해 26일 밤 12시가 넘어서야 오타와에 도착했다.

밴쿠버 경유도 쉽지 않았으나 그 이야기는 또 풀 기회가 있겠지.


2월 마음먹기

3월 유학원 알아보기

4월 휴직, 집 정리

5월 비자신청

6월 캐나다 집 계약

7월 영어학원 등록, 아이 유치원 마무리

8월 1일 출국예정이었으나 취소

15일 친구집으로 이주

23일 출국 예정이었으나 취소

25일 출국


그리고 지금 10월.

아이는 9월부터 학교에 다니고 있고, 나는 지난 주에 첫 학부모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아이 학교에 한국인은 유치원생 1명밖에 못 봤고, 동양인은 전교에 10명 남짓. 이들의 말은 너무 빠르고 영어는 여전히 너무 어렵다. 하지만 아침마다 도시락 싸는 일상에 익숙해지고 있고, 오늘은 동네 도서관에 나와 패드로 지난 여정을 남긴다. 밴쿠버나 토론토로 갔다면, 또는 오타와 안에서도 비교적 유학생이 많은 카나타 지역으로 갔다면 좀 달랐을까. 현지인 비율이 높은 올드 오타와에서 나는 매일이 어렵고 조심스럽다. 하루하루 생존하기 위한 고군분투가 쌓이면 조금 더 단단해질까.

그래서 이제 시간이 날 때마다 캐내다 생존기를 남겨보려고 한다. 앞으로 내가 이곳에서 깨지고 갈리고 단단해지는 과정을 잊지 않으려고.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