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에 물을 받는다. 가스레인지 불을 켜고 라면을 넣는다. 여기에 비비고 만두 3알을 투하한다. 고기만두도 좋고 새우만두도 좋다. 라면이 팔팔 끓고 있을 때 넷플릭스로 영화를 검색한다. 오늘 놀 준비 끝.
이런 생활로 불어나는 건 ‘살’이었다. 요즘, 사우나를 가지 못해서 체중을 재진 못했다. 꼭 무게를 측정해야만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양말을 신을 때 발에 손을 뻗는 게 버거워졌다. ‘와, 뱃살 미쳤다’라고 잠시 생각했지만 만두와 라면을 먹는 건 멈출 수 없었다.
그날도 고기만두를 넣은 라면을 준비하면서 넷플릭스를 켰다. 영화 <크레이지, 스튜피드, 러브>를 클릭했다. 이 영화에는 자신을 꾸미는 것에 관심을 잃어버린 중년 남자가 등장했다. 밑단이 질질 끌리는 Gap 청바지를 입은 주인공은 살이 처져 가고 모발은 가늘어지고 있었다. 찍찍이 지갑에 신용카드를 넣고 다니고 입을 열면 꼭 뱉어야만 한다는 듯이 아재 개그를 구사했다. 이 모습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크레이지, 스투피드, 러브>
옷을 사지 않은 지 3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침에 출근할 곳이 없으니 잘 보일 곳도 없었다. 매일 입는 청바지는 무릎 쪽이 해지기 시작했다. 카드지갑도 번거로워서 오른쪽 주머니에 카드 4개만 달랑 넣고 다녔다. 로션이 책상 위에 방치된 시간만큼 얼굴은 퍼석해졌고 미용실에 가지 않은 머리는 산발이 되어가고 있었다.
라면을 다 먹고 빈그릇을 치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 옆에 있는 전신 거울에 내가 반사되고 있었다. 자세를 바꿔가며 앞모습과 옆모습을 사진 찍듯이 스캔했다. ‘운동을 한 게 언제였지?’ 까마득했다. 아마, 5년쯤 되었을 것이다. 근래에 통 움직이질 않으니 근육량은 줄고 지방은 늘어만 갔다. 게다가, 밥을 먹을 때마다 찾아오는 소화불량은 두통으로 올라오기까지 했다.
조치가 필요했다. 1주일 후면, 2021년 새해였다. 목표를 설정하기에 이 보다 더 좋은 명분은 없었다. A4 용지를 꺼냈다. 계획이 장황하면 실천이 어려우니 1월 실천 목표만 작성했다. 케케묵은 나를 벗기 위한 실천계획.
* 1월 실천계획
1. 헌 옷 버리기
2. 하루에 30분 운동하기
3. 집에 라면 사 두지 않기
이 A4용지를 테이블 정중앙에 놓아두고 나는 가장 먼저 무릎이 해진 청바지를 버렸다. 1번은 클리어! 그리곤 2번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2021년 새해에 택배가 도착했다. 홈트 열풍에 품귀현상까지 나타났던 닌텐도 스위치와 링피트였다. 게임은 단순했다. 괴물들을 물리치기 위해선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걸 한다고 땀이라도 나겠어?’라고 생각했지만 게임 첫 판부터 이 생각은 180도로 바뀌었다.
게임 초반에는 달려가면서 만나는 괴물들이 귀여웠다. 아령 모양을 한 괴물들을 차근차근 물리칠수록 숨을 헐떡이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최종 보스인 근육 괴물 드래고는 PT 선생님보다 더한 녀석이었다. 스쿼트, 윗몸일으키기, 가슴 조이기 등 최소 10세트를 해야만 이 괴물을 물리칠 수 있었다. 20분 정도만 했을 뿐인데 근육이 뻐근해지고 젖산이 쌓여 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아기자기했던 괴물들은 더 이상 귀여워 보이지 않았다. 근육 괴물 드래고를 물리치기 위한 여정을 계속할 수 있을지 살짝 걱정이 들었다.
운동이 끝난 후, 허기가 졌다. 참치 통조림이나 닭가슴살이 있는지 수납장을 확인했다. 라면이 보였다. 그것도 단 한 개.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 실천계획 3번을 생각한다면 이 라면은 버려야 했다. 하지만 ‘왜 하나만 남은 것인가? 마지막으로 맛있게 먹으라는 뜻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 오늘까지 만이다. 나는 당분간 맛보지 못할 라면을 먹기 위해 물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