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한번에 글자들이 술술 넘어가네
처음 전자책이 나왔을때 난 도대체 누가 저런 걸 돈주고 산다는 걸까 하며 의문을 가졌었다. 책이라면 자고로 넘기는 맛이지, 책이라는 물체를 손에 들고 읽어가면서 줄어드는 페이지수를 보는 재미인데 딱딱하기 짝이 없는 단말기에 넣어서 읽는다는 게 내게는 이해되지 않는 점이었다.
내 가방 안에 꼭 들어있는 건 핸드폰, 거울, 립밤, 그리고 책이다. 게다가 1권만 쭉 읽는 진득한 성격이 못되고 이 책 저 책 기웃거리는 호기심 많은 성격 덕분이랄까, 항상 2-3권의 책을 가지고 다녀야 안심이 됐다. 점심에 이런 책을 읽고 싶을 수도 있고, 내 기분이 꿀꿀할 수 있으니까 이런 책도 필요해, 하면서 가방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어깨는 더 아파왔다.
그러다가 친구의 Kindle을 보게 되었다. 몇십 권의 책을 넣어도 끄떡없는 용량에 터치 한번이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백라이트로 눈이 부심도 없고 햇빛에 반사되지도 않는다는 스크린. 좋다고 좋다고 그렇게 얘기를 해대니 그래, 그래 한번 봐준다. 손에 들어보니 문고판 책보다 조금 더 가벼운 느낌. 터치하니 래깅되는 거 없이 말끔하게 잘 넘어가는 화면. 게다가 가장 큰 장점은 한국책을 넣어서 볼 수 있다는 점.
미국에 살면서 가장 갖고 싶었던 것은 한국책이었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던 터라 서점에만 가면 도통 집에 갈 생각을 안했다고 엄마는 말하셨었다. 생일선물, 크리스마스 선물, 어린이날 선물은 무조건 책으로 대동단결. 어린애답지 않게 나가서 놀지는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혀서 책만 읽었던 나의 유년시절. 가까이 있을 땐 몰랐던 걸까, 멀리 한국을 떠나게 되니 가장 그리웠던 건 모국어의 텍스트가 가득 담긴 책이었다. 책이라는 게 쌓이면 무게도 많이 나가고 하다보니 미국에서 책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배송비 잔뜩 붙여 파는 책값도 값이거니와 학교에 영어에 치여 그랬는지 한국어로 된 모든 게 그립고 그리웠다. 이민 올 때 가져왔던 책들을 읽고 또 읽고 읽었다. 모국에 대한 그리움을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그렇게 치유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지금 나는 책에 약하다. 조금이라도 읽고 싶으면 사야만 직성이 풀리는 못난 습관. 그래도 책을 있으면 읽게 되잖아 라고 나를 위로하곤 한다. 그런 습관이 Kindle을 사면서 맙소사, 더 심해졌다. 원클릭으로 책을 사고 바로 기기에 다운로드가 되버리니... 이건 쉬워도 너무 쉽잖아! 더이상 서점에 가지 않아도, 배송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책은 하나 둘씩 쌓여가고...
전자책은 확실히 뚜렷한 장점이 있다. 가볍게 여러 권의 책을 들고 다닐 수 있어서 여행할 때 더할 나위 없이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있으니까. 한 번 충전하면 꽤 오래 가는 배터리 수명도 맘에 드는 점. 그치만 읽으면서도 손에 넘겨지는 페이지가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종이책의 냄새, 손에 딱 들어오는 책의 그립감, 넘길 때 느낄 수 있는 종이의 질감... 당분간은 전자책과 종이책을 오가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