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게 배운 게 기억에 더 남기 마련
고등학교 때 가장 힘들었던 과목은 영어였다. 어려웠던 과목들은 따로 있었지만,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건 단연 영어였다. 한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닌 기간은 겨우 1달밖에 되지않지만, 내가 영어선생님의 지목을 받은 애제자 아닌 애제자였기때문이다.
첫 영어 시간부터 선생님은 학생들을 지목해서 문제의 답을 물어보시고는 하셨다. 어떤 날은 날짜에 따라서 번호를 부르기도 하셨고 어떤 날은 랜덤으로 지목하시곤 하셨는데, 그 때마다 항상 걸리는 학생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나였다. 왜 나를 매번 지목하셨는지 난 아직도 이유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때 그 경험으로 인해 혹독하게 영어를 예습해갔던 기억은 생생하다. 그로 인해 영어가 들어있던 날에는 더 긴장했던 기억이 아직도 있다.
미국에 와서 영어에 대한 긴장감은 더 심해졌다.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학원에 다니고, 또 교과과정으로 영어를 배웠는데, 그 영어들이 미국에서 살아가는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스피킹에 있어서는 거의 제로였다고나 할까, 전형적인 한국 교육의 폐해가 바로 나였다.
미국 고등학교의 수업 방식은 한국과는 참 많이 달랐다. 영어 시간은 특히 더 그랬다. 소설이나 희곡을 읽고 토론하는 방식의 수업을 따라가기에는 24시간이 모자랐다. 다른 수업의 숙제만으로도 힘들었는데, 매일 읽어야했던 책의 양도 상당했기에 매일 밤 새벽 3-4시에나 잠들고는 했었다. 그렇게 졸음과 싸우며 읽고 나면, 뭘 읽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당연히 다음 날 수업시간에 참여할 수는 없었다. 그룹 프로젝트같은 걸 하는 때면, 다른 친구들은 당연히 나와 하고싶어하지 않았다. 진도를 따라가지도 못하고 이해가 느린 나와 함께 하고 싶어하는 친구들은 없었기에 그럴 때마다 난 혼자서 프로젝트를 다 마쳐야했었다.
한국의 영어선생님과 달리 미국에서의 영어 선생님, Mrs. Devlin은 날 다른 의미의 애제자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 더 많이 케어가 필요한 제자, 미국에 온 이상 혹독하게 배워야 잘 할수 있을거라는 그런 믿음이 있으셨던 것 같다. 영어가 서툴다고 봐주는 식이 없었다. 모든 학생들은 똑같이 대우를 받았고, 그것이 그 때는 그렇게 서러웠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내게 도움이 되면 되었지, 해가 된 건 없었다.
다른 선생님들보다 유독 더 힘들다고 유명했던 Mrs. Devlin의 클래스에서 난 오기로 버텼던 것 같다. 이해하진 못해도 읽어야하는 양을 다 읽고 다 알아듣지 못해도 기를 쓰고 토론에 참여했던 것 같다. 점수가 낮아도 실망하지 않았고, 선생님이 귀찮아하실 정도로 질문하고 또 했다. 혹독하게 가르쳐주신 만큼, 어느 순간 영어가 예전보다 쉽게 들리기 시작했고, 읽는 속도도 빨라졌다. 이해력이 늘어갔고 새벽에 조금은 일찍 잠에 들 수 있었다.
학기의 끝이 다가올때쯤, Mrs. Devlin이 졸업에 대한 짧은 글을 써오라고 클래스 모두에게 말씀하셨다. 학생들 모두의 글을 신문사에 보내서 채택되는 학생들의 글들은 신문에 실리게 된다고 하셨다. 약간 소심한 복수랄까, "나 정말 힘들었어요" 라고 글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다. 미사여구 하나 없이 너무나 힘들었다고 썼다. 그렇지만 많은 것들을 얻었다고 기록했다. 힘들었던 시간 속에서 나는 성장했고 또 자라났다고, 꽃은 아니지만 그래도 싹을 피워냈다고 고백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그 글을 통해서 Mrs. Devlin이 조금은 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시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은 있었다.
해피엔딩이랄까, 내 글은 다른 몇몇의 학생들과 함께 채택되었고 신문에 실리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의 계획, 꿈을 다룬 스페셜 칼럼이었는데 신문사 관계자가 학교까지 와서 우리들의 사진을 찍었다. 신문이 발행되었을 때, Mrs. Devlin은 신문을 손수 구입해 글이 실린 학생들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내게도 한 부를 주시면서 나는 잊을 수 없을거라고, 잊을 수 없는 학생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게도 그렇다. 혹독하게, 어렵게 배운 것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는 말처럼, 아마 평생동안 기억날 것 같다. 그 때 배웠던 영어가 나의 평생 영어가 될거라고 말씀하시던 아빠의 말이 맞았다. 쉽게 설렁설렁 배웠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영어가 불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외국에서 온 학생이라고 특별대우 해주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가르침이 지금에야 이해가 되는 건 내가 아마 조금 더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내 방에는 신문기사를 스크랩한 액자가 걸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