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나라에서 느낀 이질감
2002년 이민을 와서 3년만에 처음으로 나가본 한국이었다.
혹독했다면 혹독했던 고등학교 생활을 마치고 졸업 후에 부모님께 졸라서 계획한 한국방문이었다.
한국이 그리웠고, 친구들이 그리웠고, 살던 동네가 그리웠고, 모든 것이 그리웠다.
모든 것이 그대로일것만 같았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깨닫게 되었지만.
하늘이 너무 흐렸다. 구름이 많이 떠있고 회색의 우중충한 하늘이 3년만에 도착한 한국의 첫인상이었다.
내가 캘리포니아의 맑고 푸른 하늘에, 좋은 날씨에 많이 익숙해진 탓일까. 6월이었는데도 후덥지근하고 불쾌하게 끈적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나를 마중나오신 고모부께 왜 이리 하늘이 우중충하냐고, 오늘 비온다고 했었냐 묻는 내게 고모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날씨 되게 맑은데?"
2005년은 서울 버스 노선표가 바뀐 해였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번호의 버스들은 다른 번호로, 다른 노선으로 탈바꿈했고, 난 그 속에서 길을 잃은 어린 양처럼 헤매었다. 지하철 노선들은 그대로라는데에 큰 위안을 받으며 시골에서 올라온 촌년처럼 여길 기웃, 저길 기웃거렸다.
서울에 쭉 살았던 서울토박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명동을 가본 적이 없어서 중학교 때 친구들과 명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지하철역에는 출구가 왜 그리 많은지, 어느 출구에서 만나기로 했는지 긴가민가한데 사람은 또 좀 많아야지. 어렵게 친구들을 만나고 반가운 것도 잠깐, 내가 간과했던 것이 있었다.
친구들과 떨어져 있던 3년이라는 시간동안, 그들은 그들의 역사를 쌓아왔고 난 그 곳에 없었다.
그들이 수능 때문에 새벽 늦게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씨름하고 있을 때, 나도 새벽까지 숙제와 시험에 파묻혀 공부했지만 그건 다른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지, 그들과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었다.
친구들이 고등학교 때 추억을 얘기할 때 내가 끼어들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친구들이 나를 배려해주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니다. 내가 미국에서 보낸 3년의 시간을 그들은 궁금해했고 나도 그들의 고등학교 생활이 궁금했으니까. 그렇지만 그 때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나는 나와 친구들 사이의 거리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느껴버렸다.
명동에서 만나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고 헤어졌다. 오랜만에 봤던 친구들이라 반가웠지만 미국에 돌아가기 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할 수 있는, 하고 싶은 얘기가 없었다. 소재고갈이랄까, 내 미국생활을 계속 얘기할 수도 없는거고, 또 날 앉혀놓고 친구들끼리 얘기할 수도 없는거고. 그 날, 난 내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불과 3년전까지 살았던 나라에서 속할 수 없는, 이방인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국어를 하고, 한국인처럼 생겼고, 한국에서 나고 자랐는데도 불구하고 청소년기, 청년의 시절에 나의 고국에 없었다는 것은 나를 완벽한 이방인으로 만들었다.
Around라는 잡지에 실린 번역가 박상미의 인터뷰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너무나도 공감되는 구절이었다.
타지에서 15년간 살았다는 건 고향에서도 영원한 이방인이 되는 거예요. 제가 여기 있지 않은 시간 동안 잃어버린 것들이 있으니까요.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젊은 시절을 보내진 못했죠. 그렇게 한 번 떠나서 살게 되면 그냥 평생 이방인으로 사는 거예요.
이보다 더 나를 표현할 수 있을까.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젊은 시절은 보내지 못한, 영원한 이방인 신세.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완벽한 미국인은 될 수 없고, 또 한국에서 살았던 기억은 어린 시절 뿐이라 내 또래의 사람들과 공감할 수 없는.
그 사실이 나를 한때 굉장히 슬프게 했다. 나는 어디에 속하는 것인지, 내가 속할 세상은, 세계는 있는 것인지. 미국에서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고, 한국에서도 겉도는 것 같은 마치 물에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은 느낌.
어딘가에 속해서 그 속에서 안전하게 머무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다는, 그럴 수 없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3년만에 발을 딛은 한국은 내게 현실을 알려줬다.
내가 한국을 떠난 그 날부터 난 영원한 이방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