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투 어메리카!
부모님은 이민을 결정한 사실을 고등학교 때까지 비밀로 하셨다.
고등학교를 1달 다니고 만우절에 자퇴를 하고 교복을 벗었다.
하루에 4시간씩 강남역에 있는 어학원에서 이민반 코스를 들었다.
스피킹, 리스닝, 라이팅, 즉 듣고 말하고 쓰는 영어의 총체적인 모든 면을 단기간에 독파시키겠다는 목적의 커리큘럼이었는데, 학생들의 나이대도 10살부터 30대까지 다양했다.
리스닝 시간에는 시트콤 프렌즈를 틀어놓고 대사 한마디 한마디를 받아적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시트콤이니만큼 실생활에서 쓰이는 영어표현들이 가득하다는 것이 이유 아닌 이유였다. 그렇게 하루에 2시간을 1편의 시트콤을 보면서 대사를 받아적던 나의 열일곱살은 이제 곧 한국이 아닌 미국으로 간다는 생각에 한껏 부풀어 수업들이 고된지조차 모르고 지냈다.
내가 상상하던 미국은 영화에서 보던 것 같이 공원에 강아지를 끌고 나와 산책하고, 가족들이 바베큐를 하고, 평화로운 주택가에서 보내는 안락한 삶 정도였다. 아무래도 영화만 보고 뭘 몰랐던 거지.
비행기가 샌프란시스코에 착륙하고 이민국 심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게 맞는 선택이었나'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만약 이게 잘못된 선택이었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미국에서 느리고 불친절하기로 유명한 이민국 직원과의 응대를 마치고 출국장에 나왔을 때 '아, 이건 아닌것같은데...'라는 느낌이 온 몸을 휘감았다. 어려서 뭘 몰랐지만 그래도 본능적으로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알고 만 것이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잠시동안 함께 지낼 외삼촌 댁에 가는 길은 낯설었다. 차창 밖 풍경들이 낯설고 무서웠다. 다른 인종의 사람들을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는데도 내가 정말 다른 나라에 온 거구나, 이 곳에서 이제 살아가야 하는거구나 라는 걸 실감했다고나 할까. 영어로 쓰여진 표지판들, 매일 보던 한국 차들이 아닌 미국 차들, 소리지르며 싸우는 흑인들, 여기저기서 들리는 영어 대화들이 날 혼란의 늪으로 더 깊게 빠져들게 했다.
외삼촌 댁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외숙모께서 감사하게도 미리 식사를 준비해놓으셨다고 해서 식탁으로 가봤는데 생전 처음 보는 반찬이 있었다. 우리 가족이 오느라 고생했다며 삼계탕을 요리해주셨는데 그 옆에 놓여져 있던 양배추 무침? 김치? 같은 음식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미국에서는 김치 담가먹기 힘드니까 이렇게도 먹어. 먹어봐, 맛있어."
우리 가족 모두 벙쪄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태어나서 그런 음식을 처음 봤기에 이게 뭔가하는 표정으로 서로만 바라보고 있다가 용기내어 내가 첫 술을 들었다.
생양배추를 살짝 절여 김치 양념식으로 무쳐낸 반찬이었는데, 그게 왜 그리 괴리감있게 느껴지던지. 김치와는 다르게 양배추 씹히는 맛에 매워서라기보다 다른 의미로 눈물이 핑 돌았다.
'난 이제 정말 다른 나라에 있는거야. 예전과는 180도 다른 삶을 살게 된거라구.'
한국과는 다른 세상이라는 걸 그 양배추 김치를 통해 실감한 순간이었다. 그 순간 이후로 양배추는 내겐 또 다른 의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