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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 Aug 11. 2018

나무

나를 사랑해줘 

여자는 강해 보였지만 속은 여렸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외유내강이 아닌 반대의 외강내유적인 의미로. 강해 보였지만 여리고 여린.


여자는 어렸을 때부터 생각했다. 난 다시 태어나면 나무가 되고 싶어. 한 자리에 붙박혀서 그대로 그곳에 있는 나무. 아낌없이 주는 나무같이 햇살이 따가울 때 그늘이 되어주고 비가 쏟아질 때 나뭇잎들로 비를 막아주는 그런 나무. 주고 주어도 더 주고 싶은 마음을 감출 길 없는 나무. 줄 것이 남아있지 않아도 그루터기에 지친 몸 잠시 쉬게 하고픈 나무. 나무 같은 사랑을 하고 싶어, 여자는 생각했다.


그렇게 주고 또 주고 싶었던 사랑이 지나가고 여자는 다시는 사랑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더 이상 나를 내주다가는 내가 남아있지 않겠구나, 내가 텅 비어버리겠구나,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프고 아프기만 했던 기억들이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도 그때 쓰라렸던 마음만은 오롯이 기억되겠구나 할 만큼 눈물만 가득했던 시간들이었다. 웃다가도 눈물이 나고 원망도 되고 자책도 하고... 사람 마음이란 게 마음대로 안 되는 건데, 안 되는 건데, 왜 나는 안되는 건데... 베어진 나무의 그루터기에는 생채기가 가득했다.


다시는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닫고 세상에 외쳤다. 난 다신 사랑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다 주지 않을 거야. 날 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의 반만 줄 거야. 아니, 다 보여주지 않을 거야. 날 다 줘버리지 않을 거야. 다시는 사랑 때문에 나를 미워하기 싫어, 여자는 되뇌고 되뇌었다. 




마음속에 자그마한 싹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녀 자신도 몰랐고 원하지도 않았다. 싹은 물을 주지 않아도 조금씩 조금씩 자라났다. 한 뼘쯤 자라났을까, 여자는 빗장을 걸어 단단히 잠가놓은 문을 살포시 두드리는 싹의 존재를 느꼈다. 너 언제 그렇게 싹을 틔웠니? 싹은 그저 그렇게 자라날 뿐이었다. 


나를 사랑해줘, 나를 사랑해줘, 나를 사랑해줘.

너의 사랑으로 자라날 수 있게 나를 안아줘, 보듬어줘, 만져줘, 품어줘, 이끌어줘.


여자는 무시했다. 듣고 싶지 않았다. 싹의 외침 따위 무시하면 그만이야. 어차피 난 그 누구도 내 마음에 들이지 않을 텐데 싹이 무슨 상관이야. 그러다가 죽겠지. 

싹은 생명력이 강했다. 공급받을 영양분이 없어도 쉽사리 힘을 잃지 않았다. 싹은 사랑을 원했다.


그 싹은 바로 여자였다. 

사실 여자는 사랑을 원했다. 갈구했다. 목마르게 원했다. 그 누구보다 더 절실히 원했다.

날 사랑해줘, 날 사랑해줘. 날 혼자 내버려두지 마, 나도 누군가가 필요해.

나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 나도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어. 나도 사랑받고 싶어.


왜 사랑하는 사람에게 외면당했는지, 버림받았는지 여자는 알지 못했다.

여자가 주고자 했던 사랑의 깊이가 그에겐 너무 깊었던 것일까, 내가 했던 말들의 의미가 그를 옥죄여온 걸까.

사람 마음이란 게 마음대로 안되는 거잖아. 내 마음이 네가 아니야. 

너를 좋아하지 않았고 좋아하지 않고 좋아할 일도 없을 거야.

그의 말들이 칼바람처럼 여자의 마음을 아프게 헤집어놓고 상처 내고 찌르고 할퀴고 있을 때 조그만 싹은 여자의 마음 안에서 폭풍 같은 바람을 맞으며 버티고 있었다.


나를 들어줘, 내 말을 들어줘, 이젠 그를 잊고 나를 사랑해줘. 나를 사랑해줘.

다만, 나를 사랑해줘.




여자는 나무 같은 사람이 필요했다.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나무. 햇살이 따가울 때 그늘이 되어주고 비가 올 때 나뭇잎들로 비를 막아주는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쉼터가 되어주고 두 팔로 감아도 다 감아지지 않을 정도로 듬직하고 기댈 수 있는 나무가 필요했다. 그것이 사랑이라 믿었기에 여자는 나무가 되고 싶었다. 주고 주고 또 주고 싶은 마음을 감출 길 없는 나무처럼 사랑을 주고 주고 또 주는 것이 사랑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에게는 사랑이 아닌 부담이었다는 것을 여자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루터기에 생채기가 나고 줄 것이 없어 뿌리가 말라 가는, 나를 바꾸고 나를 죽이는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여자는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다. 


작은 싹은 아직 그녀의 마음 안에 있다. 나를 사랑해줘, 나를 사랑해줘.

내가 나무가 될 때까지 나를 사랑해줘. 너의 사랑으로 물을 주고 햇빛을 내려주고 나를 자라게 해줘.

네 안의 나를 버리지 말고 기억해줘. 내가 꽃피우고 열매 맺는 것을 지켜봐 줘. 

난 여기에 있어. 날, 바라봐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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