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를 쓰다 - 독서휴가
셰익스피어 베케이션(Shakespeare Vacation)
조선의 현명한 임금 세종은 국가의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고 문운(文運)을 진작시키기 위해서 젊은 선비들에게 사가독서(賜暇讀書)라는 이름의 긴 휴가를 주어 편안하게 책을 읽게 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도 고위 신하들에게 3년에 한 번 꼴로 한 달 남짓의 유급 독서 휴가를 주었다. 셰익스피어 작품 중 5편을 정독한 뒤 독후감을 제출하도록 했는데 여기에서 ‘셰익스피어 휴가’란 말이 비롯되었다. –셰익스피어 베케이션 by 김경
책과 휴가, 두 가지를 한 번에 누릴 수는 없을까. 나의 오랜 바램이었다.
책을 너무나도 좋아하지만 맘 놓고 책만 읽어본 때가 언제였던가, 까마득했다. 여기저기 틈 나는 대로 몇 페이지 읽어보곤 했지만 그래도 읽는 것에 대한 갈급함이 채워지진 않았다. 직장인들은 공감할 부분인데 일을 끝내고 집에 오면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가 대부분이고, 주말은 주말을 온전히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재밌는 일 뭐 없나 여기를 기웃 저기를 기웃하다 보니 책은 읽지 못하고 시간은 어느새 일요일 밤 10시.
휴가다운 휴가를 계획하기에는 이미 여름은 다 가서 늦어버렸고 당일치기로 어딘가를 가기에는 미국 땅은 참으로 넓기도 넓다. 계속 똑같은 업무에 지쳐가던 어느 날, 함께 북클럽을 하고 있는 친구와 얘기를 나누던 중 나온 한 마디.
"어디 가서 책만 읽다가 왔으면 좋겠다."
셰익스피어 베케이션. 독서휴가.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책만 읽다가 오는 것. 내게 절실히 필요한 시간이었다. 바쁜 생활에서 벗어나 조용한 자연으로 떠나서 책만 읽고 오는 것. 도심에서 약간만 벗어나 달라지는 풍경에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생활을 잠시나마 잊고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 얼마 전 읽은 기사에서의 셰익스피어 베케이션이 떠올랐다.
세종은 촉망받는 젊은 선비들에게 긴 휴가를 주어 편안하게 책을 읽게 했다고 한다. 각자 맡은 직무로 인해 독서에 전심할 겨를이 없으니 일하지 말고 집에서 글을 읽고 성과를 내라는 뜻이었다는데, 1년에서 3년까지의 기간 동안 세종은 독서에 필요한 비용과 음식 및 의복까지 내려 그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나는 나에게 1박 2일의 독서휴가를 내리기로 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1시간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면 있는 아주 작은 바닷가 마을에 말 농장에 있는 에어비앤비를 예약하고, 회사에는 휴가를 신청했다. 각자 읽고 싶었던 책 몇 권과 읽으면서 먹을 간식, 저녁거리 등을 챙겨 떠난 여행은 내게 너무나 필요했던 쉼이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는 10분 정도만 걸어가면 바닷가가 나온다고 알려주어서 읽을 책 한 권과 블랭켓, 케이크를 챙겨 얼른 숙소를 나섰다. 걸어가는 동안 너무나 예쁜 풍경들을 만났고 사진으로 담으려 노력했지만 반의 반도 담지 못했다.
바닷가는 굉장히 한적하고 사람들도 많지 않아 조용해서 정말 평화로웠다. 블랭켓을 깔고 둘 다 엎드려 배를 깔고 책을 읽어 내려갔다. 햇살은 김영하 작가님의 말처럼 바삭바삭했고 파도소리는 철썩철썩 조용하지만 꾸준히 자신을 알렸다. 미리 사 왔던 조각 케이크를 우물우물 먹으며 나와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읽어 내려갔다. 한 시간이 넘도록 책을 읽다가 조금 쉴까 하고 누워 바라본 하늘은 정말 아름다웠다. 내가 언제 이렇게 모래사장에 누워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바라봤었지? 왜 진작 이런 시간을 내지 못했을까,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1박 2일의 여행 동안 우리 둘이 가져온 책은 10권. 1박 2일의 시간에 비하면 너무 많은 책을 가져갔지만 그래도 책들에 둘러싸여 무엇을 읽을까 고민하는 그 순간조차도 행복했다. 다음번 독서휴가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아마도 조만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독서휴가 동안 나는 민경희의 '별일 아닌 것들로 별일이 됐던 어느 밤'을 다 읽었고 친구는 최민석의 '베를린 일기'를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