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 시계 -> 룰루레몬
한 시즌이 끝나거나 마지막 녹화가 끝나면 나는 늘 여행을 선물 받았다.
나 자신에게로부터.
그 정도쯤은 나 자신에게 당당하게 선물하자
그런 사람이 되려 애쓰며 살아왔다.
아니 그런 겉멋만이 나를 살아있게 했다.
어쩌면 마음껏 탕진하는 여행을 위해서 많은 걸 감수하고 참아냈다.
그랬기 때문에 힘들지 않았다.
같은 팀 사람들이 모두 힘들어할 때 난 같은 크기로 힘들지 않았다.
그 힘든 것 뒤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내 일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의 절실함이 모든 힘든 여러 가지 거지 깽깽이들을 잊게 해 준다.
내가 하는 일은 내가 좋아하는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런데 이번엔 다음 프로를 바로 들어가게 돼서 여행을 갈 수 있을지 어쩔지 몰랐다.
그래서 수고한 나 자신에게 고생했다는 증표로 샤넬 시계를 선물하려 했다.
촬영 끝나고 호텔에 들어가서 바로 클릭을 누를 생각이었다.
중국의 한 무인도에서 마지막 촬영 날이었다.
우린 촬영 날을 포함해서 5일 정도 그곳에 머물렀다.
정말 기이했던 건 무인도와 떨어진 근처 숙소에선 와이파이나 통신이 전혀 터지지 않았는데
무인도 한가운데 모래사장에서는 와이파이가 터졌다.
숙소는 갑자기 단체 손님을 받게 되어 당황하는 뭔가 망해가는 호텔이었다.
공포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세트장 같기도 했다.
때때로 정전이 되었고 바퀴벌레와 친구가 될 수밖에 없는,
그냥 여기만 아니라면 뭐든 할 수 있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지옥이었다.
더욱 힘들었던 건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아
그때 소원은 단 하나. 뜨거운 물로 샤워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무인도로 들어가는 배는 파도가 거칠어 그야말로 롤러코스터였다.
배를 탄 전원이 구토를 했는데 그건 좀비영화 피칠갑 보다 호러였다.
그 프로그램을 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건널 일 없을 바다였다.
이러다 정말 나 죽는 거 아니야? 죽을 뻔했다.
그러나 아무도 죽지도 다치지도 않았다.
그 거센 날씨 속에 아무런 사고 없이 끝난 것만으로도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이 그때 우리를 돌보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내 예능 인생을 통틀어 모든 것이 가장 힘들었던 촬영이었다.
그만큼 가장 럭셔리한 여행을 통째로 선물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샤넬 시계는 넣어두고 다음 프로 뒷감당은 생각 안 하고 그냥 떠나자!
그날 모래사장 한가운데에서 연예인들이 썩은 동화 줄을 잡고 물에 빠질 때
내 손은 파리행 직항 티켓을 결재하고 있었다. 왜 파리였는지 모르겠다.
10년 전 에펠탑 주변만 빙빙 돌다 온 기억뿐인.
파도는 더욱 쌔지고 해지기 전에 모두가 섬을 빠져나가려면 시간이 없다.
입으론 다음 게임 스킵하고 마지막 게임을 변형해서 하자는 회의를 하면서.
내 손은 결제 클릭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내게 에너지가 샘솟는다.
가장 힘든 클라이맥스의 순간에 비행기 티켓을 사고 좌석배정까지 해버리면
다시 힘이 난다.
씻지 못해 거지꼴이어도 먹지 못해 뱃속에 거지가 들어앉아도 행복했다.
촬영 끝 즉흥 여행은 그야말로 경솔하게 짧은 시간에 결제해버리는 게 묘미다.
오롯이 직감만으로 선택하는 즉흥적 순간을 좋아한다.
마지막 녹화장, 그 정신없는 틈을 쪼개어 비행기를 예약하고 호텔까지 잡아버린다.
그 하나의 목표점이야 말로 내가 이 세계를 견뎌온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뒤돌아보니 늘 그래 왔다.
결과적으로 무사히 잘 끝나기도 했지만
마지막에 생각지도 못한 것들로 엉키는 촬영도 많았다.
아니 지금 돌이켜보면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조마조마한 순간.
행운의 여신이 마지막 고비로 날 테스트하는 것 같은 다 때려치우고 싶은 순간.
실제로 다 때려치우기 직전의 그 순간.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화장실에 가서 비행기를 결제하는 순간에
갑자기 아이디어가 샘솟기도 했다. 이상했다.
결제로 인해 나는 어떤 위기를 헤쳐 나가곤 했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파리지앵 3년 차 친구와 저녁을 먹었다.
“이거 좋지 않아?”
이 말은 일본어 발음으로 이이~ 자앙?이라고 하는데 그 친구가 가장 즐겨 쓰던 표현이었다.
일본 사진학교에 입학할 때 포트폴리오로 냈던 사진을
졸업사진전에도 똑같이 그 말을 하면서 걸었던 친구다.
그 사실이 너무 웃기고 그 말투는 더 웃겼다.
그는 일본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파리에서 활동하는 포토그래퍼다.
보그 편집장의 직통전화를 척척 받을 정도로 성공을 거머쥐었지만
내가 부러웠던 건 그가 온몸에 걸쳐 입은 자유로움이다.
그 친구의 단골 일본 가게를 갔다. 그 골목은 루브르 박물관 뒤쪽에 있었는데
들어서는 순간 이상한 이끌림을 받았다.
난 분명 파리에 있는데 파리에서도 내가 좋아할 법한 일본 가게들만 모아놓은 골목이 있다니...
전혀 몰랐던 세계였다.
난 그 골목에 매료되어 사실 그 친구의 성공담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날 그 친구는 꼭 소개해 주고 싶은 예쁜 공원이 있다고 가자고 했으나
내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난 “이이 자앙(좋지 않아)?” 그 친구의 말투를 따라 하면서
호텔에서 쉬고 싶다고 하곤 다시 그 골목으로 갔다.
마음껏 헤매어도 좋을 골목이었다.
걷다 보니 신기한 골목이 더 신기한 골목을 데리고 온다.
내 눈앞에 일본 헌책방 가게며 작은 리빙 소품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파리가 품고 있는 리얼 도쿄가 여기 있다.
이 새로운 연결을 따라 걷고 있는 내가 새로워진다.
도쿄와 닮았지만 도쿄와는 너무 다른 그곳.
이것들이 흩어져 있다면 내게 이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함께 뭉쳐 있어서 내게 주는 느낌은 달랐다.
점심시간 긴 줄을 선 일식당. 한 가게의 활기가 골목을 생기 있게 만든다.
가장 긴 줄 끝에 나도 줄을 섰다.
기다리는 시간조차 그들에겐 즐거워 보였다.
들뜬 파리지앵들 틈 사이에 내가 잘 섞여 있는 느낌마저 좋았다.
그곳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마음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공기.
그 안에, 지금, 내가 있다.
혼자라 바에 안내받았다. 메뉴판을 건네는 그녀의 머리는 백발 단발이었다.
분명 차가울, 분명 무뚝뚝할, 분명 무관심할 듯할 그녀가
봉쥬~ 하고 내게 인사하는 순간, 입에서 별들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휘리릭 재빨리 뒤 테이블을 치우는 그녀의 뒷모습에 참 이상하게도
눈길이 갔다. 단숨에 백 허그하지 않고선 못 배길 사랑스러운 뒷모습이다.
그녀의 잘록한 허리에선 건강한 에너지가 뿜어 나왔고
단단한 어깨는 가게 전체를 진두지휘하고 할 만큼 카리스마 있었다.
아 저런 할머니가 된다는 건 좀 멋지잖아?
내 워너비를 찾고야 말았다.
처음 봤는데도 그 사람의 기운을 옴팡 뒤집어 쓸데가 있다.
받아만 준다면 그녀의 밑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한마디로 닮고 싶은 할머니였다.
처음으로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해 기대감이 들었다.
나도 30년 후의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때의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어디에 있든 저 할머니의 뒷모습과 닮아있었으면 좋겠다.
마찬가지의 에너지를 품고 내 뒷모습을 본 사람들은 기어이 기운이 났으면 좋겠다.
우동을 호로록 먹으면서 생각했다.
분명 일본 우동인데, 도쿄에서 먹은 거랑은 다르다.
설명하기 힘들지만 뭔가 파리 스타일이 묻어 있다고나 할까?
우동마저 파리스럽다.
우동이 파리스러운 게 어떤 거 냐고?
그걸 먹고 나면, 갓 사랑에 빠진 인간처럼 심장이 섬세하게 두근두근 거린다.
어쩌면 파리란 사랑에 빠지지 않고 제정신으로 지내기엔 불편한 도시일지도 모르겠다.
나 이거 먹으려고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여기에 온 걸까?
에펠탑이 보이는 비싼 호텔을 잡았지만 난 일주일 내내 그 골목에 처박혀 있었다.
분명 파리 한복판인데 도쿄의 다이칸야마 골목을 톡 떼다 놨다.
파리야? 도쿄야? 그 헷갈림마저 좋다. 그 헷갈림이 계속되었으면 한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것들이 어울려 있는 풍경, 그건 나에게 즐거운 언 발란스였다.
파리도 아닌, 도쿄도 아닌, 파리와 도쿄가 섞여 있는 어떤 골목을 나는 천천히 여행했다.
골목을 걷다 보면 옆 사람의 어깨가 닿고 무릎을 어디다 둬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는...
테이블마다 물때가 낀 코딱지 만 한 사이즈의 쌀 국숫집도 있다. 역시 긴 줄이다.
저 가게도 분명 사랑받고 있구나.
프랑스가 베트남을 지배했을 때 프랑스식으로 만들어낸 쌀국수라
서울에서 북경에서 뉴욕에서 베를린에서 수많은 도시에서 먹었던 쌀국수와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새로웠다. 결국 파리스러운 쌀국수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겪었어도
또 모르는 게 많은 게 바로 나 자신이다.
여행이란 "이런 모습도 있어?" 하는 나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기회다.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고
해보지 않았던 일들에 도전하고
새로운 공기 속으로 나를 툭하고 내던져 놓는 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떠나는 것이고
혼자 떠나 보는 것이야 말로
그곳에 있는 나 자신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기회이다.
20대에 파리에 왔을 땐 유명한 관광지 싸돌아 다니느라 진을 다 뺐는데
30대에 오니 그냥 끌리는 곳을 즉흥적으로 다녀서 좋다.
걷다가 들른 공원에서 열리는 프리마켓.
어머 그 샤넬 시계!
우리가 이렇게 만나려고 내가 여기에 온 거구나!
내가 가진 현금을 모두 탈탈 털어 샤넬 시계를 샀다.
누군가의 흔적이 묻어 새것과는 비교 불가의 느낌이 났다.
아마 가격을 말하면 모두에게 혼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건 운명이다.
그렇게 운명이라고 온갖 난리 법석을 다 떨며 샀었다.
언제 멈춘 줄 모르는 시계는 깊숙한 상자 속에 처박혀 있다.
난 그때 시계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상습적 돈지랄의 타깃이 필요했고 그게 샤넬 시계였을 뿐이다.
새로운 주인을 만나 새 출발하렴!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한 시계는 나를 떠났다.
그 시계를 볼 때마다 이 모든 추억이 떠오르겠지만
나는 이 시계를 판 돈으로 더 새로운 추억을 만들기 위해
룰루레몬 주식을 샀다.
물건에 추억이 묻어 있어 정리를 못 했던 거다.
추억에도 정리가 필요하다.
룰루레몬은 요가 복계의 샤넬로 한번 입으면 절대 헤어 나올 수 없는 마성의 바지다.
벌써 많이 주가가 오른 기업이지만 요가를 할 때마다 이제 이 레깅스 없이는 못 산다!
우린 룰루 레몬의 노예!
10년 후 룰루 레몬을 입고 다시 파리에 가야지, 이거 좋지 않아? 주식을 살 때마다 설레임을 폭탄세일해서 사는 느낌이다.
그때는 프리마켓에서 또 어떤 무엇을 만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