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살아봐서 이제 보내줄 수 있어

스메그 냉장고 -> 빅히트 엔터

by 보리차

“이게 지금 니 방 상태야.”

잉크가 다 날아간 영수증과 기간 지난 쿠폰,

구겨진 현금이 뒤죽박죽인 내 지갑을 보고 친구가 말했다.

천재다. 진짜다.

내 지갑 꼬라지가 내 방 꼬라지다.


지금은 지갑도 없다.

카드 한 장만 달랑 들고 다녀서 내 생활의 바로미터는 냉장고다.


지금 내 상태가 궁금할 때는 냉장고를 열면 안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썩고 있는지

아니면 신선한 과일이 가득 차 있는지가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 지를 말해 준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건 빨리 구해 달라고 비명을 지르지만

내 몸이 힘들 땐 냉장고 문조차 열어보지 않는다.

가끔은 냉장고가 문 좀 열어 달라고 똑똑 안에서 노크를 하는 것 같다.


<냉장고를 부탁해>를 보면 유통기한이 10년 지난 것들도 툭툭 튀어나온다.

모든 냉장고는 각자의 방식으로 엉망진창이구나.

이상하게 그런 걸 볼 때 그 냉장고 주인이 솔직해 보이고 친근감마저 생긴다.


정말로 일이 잘 안 풀릴 땐 몸이 힘들어도 냉장고 청소부터 한다.

베이킹파우더를 솔솔 뿌리고

플라스틱 서랍을 꺼내 햇빛에 말린다.

머릿속으로는 이렇게 자주 하는데

손을 움직여 실제로 하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울까?


다 잘할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 빼고는 대충 한다.

포기한다. 정말 가벼워진다.

그래야 정말로 내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지키며 살 수 있으니까

그래서 냉장고 청소만은 잘하고 살자고 생각한다.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들을 보는 기쁨

양배추가 있을 곳에 아삭한 양배추가 있고 두부가 있을 곳에 촉촉한 두부가 있다.

이런 냉장고의 워너비 모델은 내 동생의 냉장고다.

도둑이 들어와 처음 열어봐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친절하고 깔끔하다.

만약 배고픈 도둑이 반찬 하나를 꺼내 맛본다면 그 집에서 못 나갈 수도 있다.

시댁이 전주라 음식 솜씨가 뛰어난 시어머니의 반찬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언니, 결혼하면 모든 걸 다시 배우게 돼,

양말 벗어 놓는 사소한 것까지도.”


결혼 전엔 흐드러지게 어지럽히는 걸 좋아하던 그녀였다.

어지럽힐 때야말로 마음이 편해진다고 했을 정도 였다.

이젠 야무지게 살림하는 동생이 내 냉장고 상태를 칭찬할 때면

나 진짜 제대로 잘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동생의 냉장고가 부러운 진짜 이유는 바깥이다.

냉장고 문에 솜큼솜큼 붙어있는 손 편지다.

참 좋아하는 부엌 풍경이다.

소중한 사람이 소중한 메시지를 소중하게 쓴 종이 말이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라는 말.

100세 시할머니가 사각사각 써내려 간 편지다.

지금 내 냉장고엔 뭐가 붙어 있지?

다이어트 의지를 불태우게 하는 모델의 뒤태가 붙어 있다.

라디오에선 주방이 깨끗하면 지저분한 사람들보다

약 100칼로리 적게 먹게 된다고 디제이가 알려준다.

너덜너덜해진 모델의 뒤태를 잡아 뜯으면서

한동안 같이 일했던 후배가 헤어지면서 한 말이 떠올랐다.

“언니 살 뺀다는 얘기만 6개월째 했어요!

진짜 지겨워요, 이번엔 정말 꼭 살 빼셨으면 좋겠어요.”


사진들을 떼면서 전용 왁스로 겉면을 꼼꼼하게 닦는다.

손 많이 가는 스메그 냉장고이기 때문이다.

문을 열 때 조금 무겁고 잉잉 거리는 소리도 가끔 심하다.

사람을 불러 고쳐도 봤는데 그게 정상이란다.

소음에 조금씩 적응해 갔고 까다롭게 굴어도 그 스메그가 좋았다.

다들 혼수로 큰 맘먹고 장만하는 디자인 냉장고였다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지금 나 자신을 극진히 대접하자는 마인드로

내가 좋아하는 그 냉장고를 질렀었다.


원하는 냉장고와 충분히 살아봤다.

그래서 이제 보내줄 수 있다.


이제 나만의 냉장고를 처분하고

미국에서 우리들의 냉장고를 사야 한다.

스메그를 팔아 삼성 주식을 사고 싶다.

삼성을 사는 이유는 서울을 잊고 싶지 않아서다.


새벽 배송된 마켓 컬리 포장을 뜯을 때의 손의 감각,

망원시장을 거쳐 한강으로 가던 길에서만 나오는 발걸음의 신남,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신청해 놓고 찾으러 가는 동네책방들,

택배를 찾을 때 어깨너머 들리는 ‘경비아저씨가 즐겨 듣는 라디오’,

배달의 민족에서 메뉴 고르고 결제가 되는 순간부터의 설렘.

죠스 떡볶이, 교촌 치킨, 뚜레쥬르 이런 건 미국에도 있지만

훈고 링고 브레드가 내 인생을 포근하게 해주는 기분은 대신할 수 없다.

그것들을 기억하고 추억하고 싶어서 삼성을 산다.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나라에서 냉장고를 사기란 짜증 날 정도로 쉽다.

블랙 프라이데이에 말도 안 되게 싸게 살 수 있다.

코스트코나 홈디포에 당당히 앞에 나와 있는 삼성가전들을 보면

너무 자랑 스러 소리 지르고 싶다.

어릴 때 이민 간 예비남편의 말에 따르면

한국의 위상은 엄청나게 달라졌다고 한다.

예전에 필리핀보다 못 살아서 필리핀이

장충체육관을 지어줬다고 아빠가 말할 때마다

그때만 해도 삼성이 소니 뺨치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아빠, 나도 BTS가 아메리칸 어워즈에 서게 될지 몰랐다니까?

미국을 들락날락하면서 입국심사가 부드러워진 느낌은 확실했다.

그 이유의 뿌리는 내겐 삼성이 아니라 BTS였다.

입국심사대에서 코리안을 대하는 태도는 분명 달라졌다.

미혼여성들은 직업에 대한 질문을 압박적으로 하는데

방송작가라고 대답하니 어떤 프로그램을 맡고 있냐고 했다.

인기가요라고 했더니 너무 신기해했고

동료들에게 "한국 인기가요 작가래" 라며 BTS 노래를 흥얼거리며 막 소리쳤다.

"작가는 많은 경험을 해야지! 즐거운 여행 해" 하면서 나이스 하게 날 보내줬다.


BTS 데뷔 초창기 시즌에 무대 레퍼런스로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지하철 무대를 고른 적이 있다.

(외국 시상식 레퍼런스로 무대를 재구성하는 건 작가들에겐 흔한 일)


그 당시엔 정말 상상조차 못 했다.

조금 훗날 BTS는 진짜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 섰다.

기적이다. 정말 살다 보니 기적이 일어나는구나.

마치 여름 성경학교에 하느님이 진짜 온 기적!

그 생생한 기적 체험은 방송작가를 하면서 받은 큰 선물이라 생각한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선물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이것 만큼은 절대 잊고 싶지 않다.

스메그 냉장고를 팔아서 BTS 주식을 사자!


얼마 전 빅히트 엔터가 상장했다.

그러곤 갑자기 곤두박질쳤는데 뉴스에선 환불 요청이 쇄도했다고 한다.

아니 주식은 환불 같은 거 안 되는데 참 재밌는 사람들도 다 있네

알고 보니 공모주에 한해선 환불해준 사례가 있다고 한다.


우리의 BTS에겐 아주 긴 여정이 펼쳐져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고 중간에 이러니 저러니 할 사람은 지금 빠져라.

10년 후에 이건 감당이 안 되게 커져 있을 건데

그때 난 월드투어 안 빠지고 악착같이 다 따라다니는 아미가 되어야지

나랑 같이 그러고 다닐 사람?

지금 잉여 물건을 팔아 빅히트 주식을 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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